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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있는 마을’서 부활한 성당… 韓 천주교 역사를 품다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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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4-09 06:00:00 수정 : 2025-04-08 21: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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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은이성지와 김가항 성당

김대건 신부 사제품 받은 상징적인 곳
상하이서 철거 후 용인 은이성지 복원
김 신부 이곳서 세례 받고 신학생 발탁

기둥과 보 등 부재 그대로 가져와 작업
‘I’자형 평면 건물서 ‘T’자형으로 변화
성당 옆 김대건기념관 두상 복제본 눈길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한다. ‘은이성지’. 누군가의 이름이 떠올라 친숙한 느낌이다. 안내를 따라 42번 국도를 빠져나와 골짜기로 5분 정도 들어서자 살짝 너른 땅이 나온다. 그곳에서 오른쪽을 바라보면 산을 등지고 서 있는 하얀색 성당이 보인다. 2001년 중국 상하이에서 철거된 성당을 15년 후 경기도 용인까지 대략 900㎞를 옮겨 와 복원한 김가항 성당이다.

성당과 관련된 사연을 살펴보려면 먼저 은이성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은이성지는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1821∼1846)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귀국해 6개월간 처음 사목 활동을 했던 곳이다. 그보다 17년 앞선 때에 그는 가족과 함께 고향이었던 충청남도 당진 솔뫼마을을 떠나 은이성지에서 동쪽으로 1.4㎞가량 떨어진 골배마실로 이사를 왔다.

2001년 중국 상하이에서 철거된 김가항 성당은 15년 후 900㎞나 떨어진 한국의 용인 은이성지에 복원됐다. 중국 전통 주택의 외관을 띠고 있는 하얀색 성당은 180년 전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곳으로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의미 있는 장소다.

김대건 신부가 15살이었을 때 피에르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발탁된 곳도 은이성지였다. 그와 함께 최양업, 최방제가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신학교로 유학을 갔다. 최방제는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는 만주의 소팔가자 성당에서 부제품을 받았다. 8개월이 지난 1845년 8월 17일, 김대건 신부는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한국인 최초의 사제가 되었다. 참고로 최양업 신부는 4년 후 상하이 장가루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되어 은이성지로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이 일대에 있는 교우촌을 찾아다니며 성사를 집전했다. 조선시대 말 천주교인들이 모여 살던 교우촌은 대부분 조선 정부의 박해를 피할 수 있는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았는데 은이성지는 경기도 남동부의 대표적인 교우촌 집결지였다. ‘은이(隱里)’라는 지명도 ‘숨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은이성지는 김대건 신부가 짧은 생애 중 10여 년을 보낸 곳으로 한국천주교회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장소다.

김가항(金家巷) 성당은 1644년 명나라 때 건립된 상하이 화동지역 최초의 성당으로 지명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金家)이 몰려 살던 거리(巷)에 지어졌다. 조선에서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많은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1841년에는 3칸×3칸 규모의 중국 전통 양식 주택을 좌우로 한 칸씩 늘렸는데, 기존 정방형 평면이 장방형(3칸×5칸)으로 바뀌었으니 더 길어진 방향에 맞춰 출입구가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김가항 성당은 남경교구의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김가항 성당 내부. 중국 상하이에 있던 김가항 성당에서 가져온 목자재에는 시간의 흔적이 묻어 있다.

김대건 신부의 사제 서품 이후 김가항 성당은 본당과 교육관으로 사용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일어나면서 성당은 몰수되어 철공소로 바뀌었다. 이 건물은 1987년 다시 성당으로 사용됐으나 2001년 상하이 정부의 푸둥 개발에 따라 철거됐다. 철거 직전 수원교구는 김가항 성당을 은이성지에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복원하려던 자리에 있었던 이쑤시개 공장과 이전 합의가 늦어지면서 복원 작업도 미뤄졌다. 결국 2016년 9월 24일이 되어서야 성당 복원이 완료됐다.

은이성지에서 부활한 김가항 성당에서 원래 성당에 쓰였던 부재(部材)는 4개의 기둥과 이를 연결하는 2개의 보(beam), 보 위에 세우는 1개의 짧은 기둥(동자주)이 전부다. 건물 내부의 다른 기둥이나 보와 비교했을 때 표면에 시간의 흔적이 많이 묻어 있는 기둥과 보가 원래 성당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이 부재들은 건물 가운데에 배치되어 있는데, 마치 성인(聖人)의 유골 일부를 다른 곳으로 옮겨 신앙의 상징으로 삼듯 은이성지에서 한국인 최초의 사제가 탄생하는 순간을 목격한 증언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평면상으로는 원래 건물에서 좌우로 한 칸씩, 건물 전면으로 한 칸이 늘어났다. 그래서 원래 ‘l’자형 평면의 건물은 복원 후 ‘T’자형 평면이 되었다. 이 중 전면으로 늘어난 한 칸은 성당 내부로 들어서기 전 신자들이 옷매무새와 마음을 가다듬는 전실(前室)로 쓰이고 있다. 전실에 서서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기 위해 성당의 문으로 들어섰을 순간을 상상해 봤다. 물론 당시는 전실이 없었지만, 김대건 신부는 문 앞에서 자신이 짊어질 사제라는 소명의 무게감을 생각하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두개골을 근거로 복원한 두상 복제본. 은이성지 홈페이지

김가항 성당 옆에는 한옥으로 지어진 김대건 기념관이 있다. 이곳에는 가톨릭대학교 의대에 보관돼 있는 김대건 신부의 두개골을 근거로 복원한 두상 복제본이 전시돼 있다. 그간 김대건 신부를 묘사한 초상화나 동상에서 그는 강인하고 굳은 의지를 지닌 인물로 표현돼 왔다. 덥수룩한 수염이나 중년의 인상, 심각한 표정은 그를 한국인을 닮은 예수나 한국인 신자들을 하늘 주인(天主)에게 이끌 강력한 선도자의 모습을 나타낸다. 모두 천주교인이 원하는 김대건 신부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복원된 두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갸름한 턱선에 곧고 긴 눈의 얼굴은 훨씬 어리고 여려 보인다. 사실 그가 순교한 나이(25세)를 고려하면 이 모습이 실제와 더 가까울 것이다.

사제가 되어 돌아온 이듬해 김대건 신부는 제3대 조선교구장이었던 페레올 주교의 입국을 돕다 황해도 순위도에서 체포됐다. 조선 정부는 라틴어를 비롯해 여러 언어에 능통한 김대건 신부를 끊임없이 회유했지만 결국 그는 순교를 택했다. 18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는 서울 용산구에 있는 새남터에서 국문효수형에 처해졌다. 그가 조선 정부의 선언에 상징이 되지 않기를 바랐던 천주교인들은 목숨을 걸고 그의 주검을 안성의 미리내 성지로 옮겼다. 그중에는 당시 17세였던 이민식도 있었다. 이민식과 신자들은 미리내 성지로 가기 전 은이성지에 들렀다. 김대건 신부가 순교 전 사목 활동을 했던 곳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의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민식을 비롯한 신자들이 김대건 신부의 주검을 업고 은이성지에서 미리내성지까지 달린 길은 현재 ‘청년 김대건 길’이 되었다.

은이성지를 다녀오고 몇 주 뒤, 집 근처 성당을 다녀 온 아내가 새로 부임한 보좌 신부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 같으면 별 관심 없이 흘려들었을 텐데, 순간 은이성지에서 봤던 비슷한 나이대의 김대건 신부 모습이 떠올랐다. 본당에 갓 부임한 보좌 신부의 포부가 천주교인들의 구원이나 대한민국의 평화만큼 원대할 리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내일이 오늘보다 안녕할 거라는 믿음을 신자들에게 주는 것을 소임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청년 김대건도 고단한 삶을 사는 당시 천주교인들의 내일이 조금 나아지기를 바라는 꿈을 꾸었을 거라 짐작해 본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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