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깊은 역사를 지닌 유니버설발레단이 4년만에 ‘지젤’을 무대에 올린다. 1841년 프랑스 파리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된 후 19세기 낭만주의 발레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 잡은 발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지젤’은 1985년 초연 이후 한국 발레단 사상 첫 해외진출의 물꼬를 튼 작품이다. 또 1989년 문훈숙 단장에게 동양인 최초로 키로프발레단(현 마린스키발레단)에 ‘지젤’로 초청되어 일곱 차례의 커튼 콜을 받으며 ‘영원한 지젤’이라는 별칭을 안겨준 작품이다. 이후 1999년 헝가리, 이탈리아, 스페인에 이어 이듬해에는 스위스, 영국, 헝가리, 오스트리아까지 한국 발레단 최초로 유럽 무대에서 진출해 작품성과 흥행성을 입증했다.

특히 무용계에서 발레리나에게 ‘지젤’은 ‘발레리나의 햄릿’으로 여겨지는 더욱 뜻 깊은 작품이다. 1막에서는 발랄하고 순수한 시골 소녀로 등장하다가 연인 배신에 무너지는 심리적 몰락을 섬세하게 표현해야 한다. 한층 고난도인 2막에서는 죽은 영혼, 윌리로서 초현실적이면서도 숭고한 사랑을 상징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무용수의 극적인 전환 연기가 필요하고 팔 동작의 미묘한 뉘앙스, 호흡과 시선까지 무용수가 가진 모든 연기력과 테크닉의 극한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지젤’ 주역 데뷔는 한 무용수 경력에 있어서 단순히 춤을 잘 춘다는 것을 넘어서 작품을 이끌어갈 수 있는 진정한 발레리나로 인정받는 분기점이다. 이번 공연에서 이 어려운 관문을 처음 넘게 된 전여진(32), 이유림(28) 두 발레리나를 9일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발레단에서 만났다.

-‘지젤’공연캐스팅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처음 봤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이유림 “(주역 발탁의)기대는 했지만 확신은 없었어요. 막상 (캐스팅표에서) 이름을 보니 기쁘면서도 걱정이 앞섰죠. 다른 작품은 해봤지만 ‘지젤’은 처음이고, 파트너도 새 친구여서 기대 반, 걱정 반이었어요.”
전여진 “첫 주역인데 전혀 예상 못 했어요. 너무 기뻤어요. ‘할 수 있을까’보단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고요. 무대에 빨리 서고 싶어서 설렘에 기뻤던 감정조차 잊을 뻔했습니다.”
-특히 여성 무용수에게 의미가 깊은 작품인데 두 분에겐 어떤 의미를 지닌 작품인가요.
전여진 “정말 어릴 때부터, 장난처럼 ‘우리 나중에 무용 그만둘 땐 지젤 하고 그만두자’ 할 정도로, 꿈 같은 배역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그 지젤을 처음으로 맡게 된 거예요. 꿈이었던 배역으로 첫 주역 무대를 서게 된 거죠. 20대 초반에 첫사랑을 경험하면서 '지젤'의 감정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하지만 막상 해보니 생각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이유림 “저는 오히려 ‘지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잘 어울린다고들 했지만, 제 춤이 에너지가 강한 편이라 고민이 많았죠. 그런데 막상 (서울 공연에 앞서 고양에서 먼저)무대에 서보니 이만큼 다양한 감정을 품은 작품도 드물더라고요. 첫 공연을 올리고 나서 '세 손가락 안에 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면 할수록 특별해지는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공연 끝나고도 바로 집에 가지 못하고 극장에서 제일 늦게 나왔어요.”

-지금 기준으로는 시대착오적일 수 있는 ‘지젤’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해석하셨나요.
이유림 “'지젤'에게 다가가기가 어려웠어요. 작품 자체도 그랬지만, 캐릭터 자체도 다가가기 어려웠고, 처음 보는 도구를 만난 느낌이었어요. 이걸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고 사용 설명서를 읽어보고 싶은 심정이었죠. 첫 리허설은 고장 난 사람처럼 했을 거예요. 잘 기억도 안 나요. 어느 순간부터 잡히더라고요. 파트너, 선생님, 상황, 작품성, 캐릭터 등이 잡히면서 '내가 어떤 성격의 지젤을 해야겠구나'라는 게 서서히 잡혔어요. 실은 아직도 정답을 모르겠는 캐릭터예요. 이전에 공연을 하면서 '이번 연도에 이유림은 이 캐릭터를 이렇게 만들었어'라는 느낌으로 공연을 계속 올렸다면, 이번에는 아직 종잡을 수 없어 어떻게 나올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전여진 “요즘 세상에 없는 사랑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을 너무 좋아해요. 관객들이 볼 때 제가 느낀 것처럼 요즘 세상에 없는 사랑이기 때문에 많은 걸 느끼고 힐링도 느끼지 않을까 생각해요. 해바라기 같은 사랑, 순수한 사랑, 이 사람 때문에 죽을 수 있는 사람. 지금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진짜 옛날 감정으로 들어가면 저런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죽어서까지도 남자 주인공을 보호해 주는 '지젤'처럼요. 현대 여성으로서 반감이 생기려고 하다가도, 역할을 하면서 '이렇게 순수한 사랑이 있었지' 하면서 다시 마음을 순수하게 바꾸게 돼요.”

-'지젤'에서 어떤 장면이 그렇게 어려운가요? 가장 유명한 장면인 ‘매드신(Mad Scene)’인가요.
전여진 “저는 매드신보다도 1막 지젤의 첫 등장부터 왈츠 파트까지가 정말 어렵게 느껴졌어요.
자연스럽게 연기해야 하는 부분인데, 그걸 연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솔로 무대에 익숙하다 보니 군무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게 더 힘들었어요. 주인공으로서 중심에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과 어우러져야 하잖아요. 그런데 자꾸 저도 모르게 혼자 숨게 되고, 따로 노는 느낌이 생기더라고요. 지금도 여전히 찾는 중이에요. 어울리면서도 주인공으로 보이기, 그 경계를 찾는 게 제겐 큰 과제예요.”
이유림 “저 역시 지젤의 첫 등장부터 왈츠까지가 제일 어려웠어요. 그 구간은 뭔가 뮤지컬과 연극의 중간 지점 같아요. 대사 없이 감정을 표현해야 하고, 동작 하나하나에 설득력이 있어야 하죠. 저는 그 부분을 연극처럼 풀고 싶었거든요. 마치 멜로디 없는 독백처럼요. 그런데 저는 뮤지컬도 연극도 해본 적이 없어서, 감정만으로 끌고 가려는 게 쉽지 않았어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감은 있는데, 몸이 그걸 따라주지 않아서 고민이 많았죠. 그래서 지금도 그 장면은 계속 탐색 중이에요. 연극처럼 섬세하게, 그러나 발레답게 표현하고 싶어요.”

-그래도 가장 중요한 장면일 ‘매드신’은 어떤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습니까.
이유림 “매드신이라는 명확한 타이틀 덕분에 처음엔 방향 잡기가 쉬웠어요. 그런데 연습을 하다 보니 감정이 자꾸 과해졌어요. 진짜 미친 사람처럼 돼버리는 거예요. 그때 문훈숙 단장님께서 말씀하셨죠. ‘사람이 치매에 걸려도, 심성이 고우면 예쁘게 미친다. 반대로, 성격이 안 좋던 사람은 왈가닥처럼 미친다’고요. 그 말을 듣고 깨달았어요. 저는 너무 감정적으로 쏟아붓고만 있었구나.
그래서 공연 직전부터 완전히 접근을 바꿨어요. 순수한 시골 소녀였던 지젤이 그 심성을 그대로 안고 미쳐버린, ‘곱게 미친 아이’처럼 표현하려고 했어요. 앞으로도 그 방향을 유지할 생각이에요.”
전여진 “제가 가장 신경 썼던 건, ‘지나치게 미쳐 보이지 않게’ 표현하는 거였어요. 누가 봐도 ‘정신이 나갔다’는 느낌보다는, 너무 슬퍼서 멍한 상태가 되길 바랐죠. 멍하게만 서 있어도 관객이 ‘저 사람 정말 슬프구나’ 하고 느낄 수 있도록요. 동작도 과하지 않게 최대한 절제했어요. 감정은 가득한데, 겉으로는 조용한 상태…. 그런 장면을 만들고 싶었어요. 눈물도 억지로 짜내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끔 연습했죠. 관객이 보면서 ‘쟤 어떡해… 너무 안타깝다’는 감정을 느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매드신을 준비했어요.”
-‘지젤’을 이처럼 어렵게 준비하면서 많은 성장도 있었을 텐데 어떤 경험인가요.
전여진 “주역이 된다는 건 단순히 혼자 잘 추는 게 아니더라고요. 작품 전체를 어우르고, 파트너와 군무, 심지어 관객과도 소통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는 예전엔 무대에서 시선을 아래로 두는 습관이 있었는데, 지젤처럼 드라마가 중요한 배역에선 오히려 단점이 되더라고요. 그걸 알게 된 것도 큰 수확이고, 요즘 가장 집중해서 고치려는 부분이에요.”
이유림 “가장 많이 성장했다고 느낀 부분은, 바로 ‘힘을 빼는 법’이에요. 발레는 정말 힘든 예술이잖아요. 모든 예술이 그렇겠지만, 무용은 특히 피지컬하게 힘든 영역이죠. 그런데 그걸 힘들어 보이지 않게 하는 게 바로 예술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힘을 뺀다’고 해서 완전히 축 처지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근육은 단단히 유지한 채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이게 하는 것. 그게 정말 어렵더라고요. 예를 들어 2막처럼 떠다니는 느낌이 필요한 장면에서는 몸의 긴장을 어느 지점까지 유지하면서도 가볍고 날아가는 듯 보여야 하거든요. 그래서 이번 공연 준비하면서는 그 ‘톤’ 자체를 바꾸고 싶었나 봐요. 예전 같으면 공연 직전까지 긴장하면서 스프레이 뿌리고 준비하고 그랬는데, 이번엔 정말 편안하게 공연 30분 전까지 샌드위치 먹고 있었어요. 그러다 무대 문을 여는 순간, 몸이 먼저 알아서 반응하더라고요. 긴장 대신 여유가 있었고, 그게 오히려 무대에서 더 잘 드러난 것 같아요. 그 경험이 제 안에서 크게 남아 있어요.”

-지금 차세대 주역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유림씨는 유니버설발레단 입단 전에 헝가리 국립발레단에서 7년간 활동했죠. 해외 진출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이유림 “헝가리 국립발레단에서 8년 넘게 예술감독을 맡고 계신 단장님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콩쿠르에서 1등을 했어요. 그런데 시상식에서 종이 한장을 더 받았죠. 뭔가 했는데 나중에 교수님이 알려주시더라고요. ‘발레단에서 너를 데려가고 싶어 한다’고요. 단장이 비서에게 ‘계약서 빨리 보내라’고 직접 지시했고, 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다닐 땐데 은사님 권유로 결국 가게 됐어요. 처음엔 한예종을 졸업하고 싶었지만 은사님께서 ‘지금 나가라, 실패해도 돌아올 수 있다’고 격려해주셨죠.
-헝가리 현지 적응은 어땠나요.
이유림 “저 혼자 모든 시선을 받았어요. 어린 동양인 무용수가 단장 추천으로 덜컥 들어오니까 내부에서도 ‘쟤가 누구냐’고 했고요. 지도위원들은 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대신 한국인 무용수가 두 분 계셔서 빨리 적응할 수 있었어요. 7년간 다양한 안무가들과 직접 작업하면서 무대 경험을 정말 많이 쌓았고, 지금 생각하면 큰 자산이에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가족이 그리워졌어요. 특히 외동딸이기도 해서 ‘한국에서 날 키워준 부모님 앞에서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러다 여름에 잠시 귀국했을 때 수석무용수 이현준 오빠와 공연을 했는데, 그때 제가 늘 지켜온 기본적인 춤의 태도와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 주셨어요. 그걸 계기로 확신이 생겼어요. ‘나는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춤을 춰야겠다’는 확신이요. 고생하지 않은 것 같다고요? 고생했죠(웃음). 집에 도둑도 들고, 여권도 잃어버리고, 월급은 월세로 다 빠져나가고…. 시장 물가는 높은데 급여는 낮고. 다 말로 하긴 힘들지만, 그 어린 나이에 혼자 겪기엔 정말 쉽지 않았어요.”

-전여진씨는 삼십대에 ‘지젤’로 첫 주역 데뷔를 하게 됐습니다.
전여진 “여섯살 때 발레를 시작했고 그래도 선화중·고 안에선 발레를 잘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발레단에 들어왔는데 그때 ‘나는 무조건 무대에 서는 사람이고 주역은 당연히 될 수 있지’라는 오만함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현실은 전혀 달랐어요. 군무로 무대에 서다가 잘리기도 하고, 뒷줄로 밀리기도 하고…. 그제야 깨달았어요. ‘내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이게 내 문제였구나.’ 너무 실망스럽고 속상했지만, 그때부터 ‘내가 그래도 이 안에서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어요. 군무 안에서도, 좀 더 예쁘게 추고 싶고, 좀 더 잘 어우러지고 싶고, 그런 욕심이 있었던 거죠. 그렇게 몇 년 지나고 나서 이제 솔리스트가 되고, 이제 주역을 해야 하는데 ‘나는 지금 있는 걸 열심히 하자’는 생각으로 바뀐 거예요. 그랬더니 이제 그다음이 열리더라고요.”

-‘지젤’을 놓치면 안 되는, 꼭 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전여진 “요즘 세상에 없는 이야기. 순수함 그 자체입니다. 순수한 자연을 보고 감동하듯이 우리 ‘지젤’을 보고 마음에 위안을 얻고, 눈물 흘리고, 감동하고 에너지를 빵빵빵 받아갔으면 좋겠어요.”
이유림 “저희 주역 페어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군무 친구들 리허설을 옆에서 보는데 정말 감탄했어요. 각자 ‘나는 지젤이야’, ‘나는 미르타(윌리의 여왕)야’ 하면서 연기하고 있더라고요. 로봇처럼 맞춰 추는 게 아니라, 모든 윌리들이 진짜 감정으로 무대에 서 있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내가 이런 단체에서 주역을 하고 있구나’ 하는 자부심이 들었고요. 관객분들도 꼭 그걸 느껴주셨으면 해요. 무대 위에 있는 모두가 지젤이고, 미르타예요.”
유니버설발레단 ‘지젤’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4월 18일부터 2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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