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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여성의 소송·풍기문란 단속 저항… 또 다른 ‘역사 보기’

입력 : 2025-04-26 06:00:00 수정 : 2025-04-24 2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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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람들의 일상사/ 권내현 외 8인 지음/ 푸른역사/ 2만9800원

 

성리학 이념이 생활 전반에 침투해 있던 조선 후기. 일상이 성리학의 틀에 옥죄어 이 시기 여성들은 수동적으로 침묵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 후대는 쉽게 추측하지만, 그들은 사회 구조와 이념에 매몰되어 숨죽이는 존재만은 아니었다. ‘작은 사람들의 일상사’에 수록된 김경숙 서울대 교수(국사학과)의 글은 18세기 한 사대부 여성이 법적 주체로 활약한 활동상을 추적하며 이러한 사실을 드러낸다.

 

전남 영광 지역에 세거한 영월 신씨 신정수 처 서산 유씨(1673∼1737)는 남편 사망 후 가족 묫자리 문제로 남편의 친척과 대립을 빚는다. 문중 여론을 움직여 상대를 압박했지만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유씨는 관청에 소를 제출하고 소송 활동을 전개한다. 여성이 소송 당사자로 나설 땐 남성 대리인을 세우는 게 당연시되던 시대, 유씨는 곱지 않은 시선들에도 불구하고 직접 소송에 나서 승소 판결을 받아낸다. 훗날 유씨는 도망간 노비를 추심하기 위해 소송은 물론 임금에게 억울한 사정을 알리는 상언(上言)·격쟁(擊錚)까지 불사한다. 유씨는 거대한 역사 흐름 속에서 이름 없는 한 개인에 불과했지만 그와 같은 민중의 삶이 축적되어 역사의 한 축을 이뤘다.

권내현 외 8인 지음/ 푸른역사/ 2만9800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지만, 실상 역사를 남길 수 있던 건 소수의 권력자와 엘리트였다. 하지만 국가·위인·자본 등 거시적 구조가 아닌 개별 행위자의 다층적 실천에 초점을 맞추면 얘기가 달라진다. 민중은 언제나 시대별로 주어진 환경에 따라 삶의 조건이 규정되면서도 그 조건을 전유하며 인간다운 삶을 추구했다. 이 책은 ‘작은 사람들’의 일상 속 사건들로 역사 다시보기를 시도하는 논문 8편을 모았다.

 

1990년대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은 ‘일상사’ 연구를 지향한 논문들이나, 학문사적 의미를 떠나 책에 실린 모든 글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이야기로 읽힌다. 1556년 대구 한 양반가에서 벌어진 가장 가출 사건이 가족 해체로 귀결되는 갈등상(권내현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일제강점기 조선 민중의 일본 천황제 수용을 둘러싼 밀고와 투서, 지배자에 대한 ‘동조’(정병욱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1950∼1960년대 여학생에 대한 ‘풍기문란’ 단속과 이에 대항한 여학생들의 저항과 일탈(소현숙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소 학술연구팀장) 등 역사책에서는 만날 수 없는 흥미로운 역사를 마주할 수 있다.

 

1960년대 일본 교토에서 민족학교 건립을 둘러싼 갈등을 담은 이타가키 류타(도시샤대 사회학과 교수)의 글도 놓치기 아깝다. 주민과 공공단체·정당이 냉전과 한·일 회담을 배경으로 합종연횡하며 조선인 학교 건립 공사를 끝내 막아낸 이야기에는 냉전과 일본의 조선인 차별 논리가 뒤섞여 있다. 저자는 21세기에도 일본 사회에서 조선학교에 대한 공격이 만연한 풍경을 보며 “냉전기의 망령이 보이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고 한탄한다.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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