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을 오가는 여객선 버지니아호에서 태어나 화부(火夫) 손에 키워졌다. 즉흥곡 타건에 열 오른 피아노 줄로 담뱃불을 붙일 수 있었던 절대음감과 천재적 재능의 피아니스트. 그를 만날 수 있는 건 오직 버지니아호 승객뿐이다. 수많은 이가 배에 오르고 내렸지만 33년 짧은 평생 끝내 육지에 발을 딛지 않았다. 단 한 곡도 악보에 남기지 않았고, 단 한 사람도 그의 연주를 끝까지 베끼지 못했다. 자유롭고도 고독한 영혼, 음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침묵을 통해 삶을 증언하는 존재. ‘노베첸토’라 불렸던 이 불가사의한 삶을 배우 오만석이 1인극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마치 무대를 화폭삼아 열한명이나 되는 등장인물을 형형색색의 붓터치로 그려내는 연기다.
23일 서울 대학로에서 만난 오만석은 데뷔(파우스트·1999) 이후 1인극을 만난 건 처음이라며 “제안을 받았을 때 도전 의식이 생기더라. 원래 ‘도전하는 것에 인색하지 말자’고 생각하고 사는데, 이번에 그 말이 딱 와 닿았다”고 말했다.

-1인극 무대는 처음인가.
“온전히 1인극으로 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제안을 받았을 때 도전 의식이 생기더라. 원래 ‘도전하는 것에 인색하지 말자’고 생각하고 사는데, 이번에는 그 말이 딱 와 닿았다.”
-1인극이 배우에겐 도전일 텐데 어땠는가. 연습과정도 여느 때와 달랐을텐데.
“대본의 방대한 양에 깜짝 놀랐고, 아주 잘 쓰인 원작 글에도 감탄했다. 과연 내가 이걸 소화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한번 해보자고 결심했다. 연습 과정은 확실히 기존 작품들과 달랐다. 보통은 상대 배우가 있고 리액션을 통해 무대를 만들어 가는데, 이번에는 보이지 않는 리액션을 상상하며 혼자 무대를 끌고 가야 했다. 힘들기도 했지만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재미가 있었다.”
-어떻게 암기를 하나.
“전체 이야기의 흐름이 잘 연결되는지 먼저 체크한다. 문제가 있거나 어그러지는 부분이 있으면, 어떻게 하면 연결고리가 잘 이어질 수 있는지 먼저 고민한다. 연결이 잘 된다 싶으면 그다음에 외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 말을 하면 그다음 말을 하고 싶어지고, 서로 고리가 물린다. 그러면 더 잘 외워지고, 이야기가 가진 힘도 커진다.”
-대본을 항시 들고다니나.
“연습실에서만 연습하는 게 아니라, 밥 먹다가도, 얘기하다가도, 이게 이런 상황에서 쓰일 수 있겠다,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겠다 싶으면 메모하거나 대본에 많이 쓴다. 대본에 줄을 긋거나, 그림을 그려보거나, 이해하기 쉽게 어미를 고치거나, 긴 문장은 나누거나, 불필요한 건 압축하거나, 필요하면 늘리기도 한다. 작품할 때마다 나만의 대본이 하나씩 나온다.”
-1인극이기도 한데다 무려 11명을 연기해야한다. 어렵지 않았나.
“그게 이 작품의 엄청난 매력은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를 음악과 함께 풀어내는 게 더 매력적이다. 1인 11역은 이야기를 풍성하게 보이는 데 양념 같은 역할이다. 인물들을 디테일하게 분석하기보다는, 특징적인 요소만 끌어와서 효율적으로 접근했다. 11명이 모두 엄청 다 달라야 한다는 개념보다는, 이야기를 잘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쓴 것 같다.”

-‘노베첸토’라는 인물은 어떤 존재로 다가왔나.
"노베첸토는 정말 독특한 인물이다. 배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죽음까지 배 위에서 맞은 사람이다. 실생활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존재다. 누군가는 그를 불행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가 가진 능력과 고유한 세계 덕분에 오히려 존귀한 인물로 느꼈다. 타고난 환경 덕분에 우리와는 전혀 다른 감각을 지닌 존재 같기도 하다."
-노베첸토가 끝내 육지에 내리지 않은 이유를 배우로서 어떻게 해석했나.
“정의를 확 내려버리는 게 관극에는 도움이 안 될 것 같긴하다. 배에서 내리기 직전, 육지를 보면서 동경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찰나에, 어느 감정이 더 우세한지는 상대적이라 그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육지를 동경하다가 그게 불행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면서,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오히려 누군가에게는 행복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왜 이 안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나’라는 성찰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다시 동경의 대상을 배로 옮기는 과정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순간 동경보다 두려움이 더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동경의 대상이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배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기로 선택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계단을 내려오다가 멈춰서는 장면이 있다. 그때 단순히 두려워서 물러나는 느낌이 아니라, '내가 이 세계를 선택한다'는 미소를 지으려 했다.”
-어느쪽이든 쉽지 않은 선택인가.
“그렇다. 어떻게 보면 니체의 생각에도 닿아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배에서 태어나 한 번도 내리지 않은 삶을 사는 게 불행한 게 아니다. 이 안에서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지 않을까’라는 사고의 전환이 노베첸토가 배에서 내리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됐다. 내리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라 내리지 않는 것도 용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눈물 흘리는 장면이 관객에게도 깊은 감동과 공감을 주는 순간이었다.
"침몰하는 배 밑바닥에서 팀 투니와 대화하는 장면이다. 노베첸토의 입장에서 대사를 하다가 어느 순간 팀 투니의 감정이 확 튀어나온다. 저런 선택을 이해는 하지만, 나 같으면 저러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났다. 노베첸토로서 웃고 있지만, 팀 투니로서 슬퍼하는 감정이 섞이는 순간이었다."
-이번 공연을 위해 트럼펫 연주까지 직접 소화했다. 준비 과정은 어땠나.
"트럼펫은 원래 할 줄 몰랐다. 이번 공연을 위해 급하게 시작했다. 입에 트럼펫을 물고 계속 불었다. 주차장에서도, 차 안에서도, 이동할 때마다 틈틈이 연습했다. 처음에는 소리도 안 나서 스트레스가 심했지만, 매일 하다 보니 점점 나아졌고, 지금은 소리가 나면서 재미도 생겼다. 취미로 계속해볼까 생각 중이다."

-인터뷰 후 무대에 오르는데 특별한 루틴이 있나.
"공연 전에 항상 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입으로 다 한 번씩 하고 올라간다. 다른 공연에서는 주요 장면만 복습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번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야 마음이 놓인다. 혼자서 이야기 전체를 끌고 가야 하니까 더 철저하게 준비하게 된다."
-데뷔가 1999년 ‘파우스트’의 바그너역인데 어떤 무대였나.
“괴테 페스티벌 무대였는데, 완전한 연극이라기보다는 낭독극 형식에 가까웠다. 대본을 들고 움직이는 방식이었고, 연출은 교수님이 맡으셨다. 학교 안에서는 많은 공연을 했지만, 출연료를 받고 무대에 오른 작품이어서 데뷔로 생각한다. 99년 봄에 ‘파우스트’를 하고 가을에 연극 ‘이(爾)’를 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정기공연 작품으로 했다. 작품이 잘 나와서 학교 외부(연우무대 2000년 초연)로 나가게 된 것이다. 그걸 통해 연극계 선생님들이 좋게 봐주셨고, 상도 처음 받았다.”
-‘공길’이나 ‘헤드윅’이나 특별한 역할을 자주 맡았다.
“‘이’작품도 리딩할 때는 연산군 역할을 준비하고 있었다. 열흘 넘게 리딩을 하면서 연산군으로 연기하고 있었는데, 캐스팅 발표하는 날 갑자기 공길로 바뀌었다. 당시에는 많이 놀랐고, 당황도 했다. 감독님이 "공길할 만한 애가 너밖에 없다"고 하셨다. 그때부터 영화도 보고, 관련 자료도 찾아보면서 부랴부랴 준비했다.”
-배우 오만석하면 ‘헤드윅’이 떠오른다.
“당연히 너무나 애정이 가는 작품이다. 처음 ‘헤드윅’을 준비할 때 정말 힘들었다. 노래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단순한 락이 아니라, 박자가 쪼개지고 ‘오리진 오브 러브’ 같은 노래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가 음악적이기도 했다가... 락 넘버라고 해서 막 지르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훨씬 더 디테일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박자나 감정선을 살리는 것도 너무 어려워서, 지하주차장이나 차 안 같은 곳에서도 혼자 노래를 계속 불렀다. 거의 온종일 노래만 연습할 정도였다. 헤드윅은 진짜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작품보다 더 스트레스 많이 받았던 작품이다.”
-‘헤드윅’은 소극장 공연 때가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배우로서 소극장 무대를 더 좋아한다. 헤드윅도 소극장 버전을 더 좋아한다. 원래 마이너가 가지고 있는 매력들이 있는데, 메이저로 넘어가면서 매력이 감소된 부분이 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책도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듯이, 공연도 그런 식으로 변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 ‘헤드윅’은 책처럼 스스로 잘 성장해왔다고 본다. 그렇지만 대극장 버전은 버전대로 두되, 이제는 또 다른 성격을 가진 것들을 짚어볼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있다."
-2008년부터 연출도 여러 작품 해오고 있다. 연출과 연기 중 어떤 게 더 힘든가.
“둘 다 힘들고 둘 다 재미있다. 마치 중식과 일식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연기가 조금 더 익숙하긴 하지만 최근에는 연출 섭외가 더 자주 들어온다. 특히 올해 들어 연출 섭외가 많이 늘어서, 어렵다기보다는 점점 더 재미있게 느껴지고 있다. 배우로서 무대에 서는 것도 재미있지만, 내 연기를 스스로 객관적으로 볼 수는 없다. 연출가로서 배우들의 연기를 모니터링하고 방향을 제시하며, 그들이 만족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매우 큰 즐거움이다. 이런 점에서 연출이 적성에 잘 맞는다.”
-2022년부터 모교인 한예종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감회가 어떤가.
“학교에서 배운 것과 얻은 혜택이 많아, 후배들과 공유하고 도움을 주는 일이 즐겁다. 또한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도 잘 맞는다. 보통 주 2~3일 수업하고, 지난 학기엔 주 3일씩 출강했다. 주로 카메라 연기와 연극 연기를 가르치고 있으며, 주제별 특강도 맡고 있다. 직접 연기하는 것보다 학생들이 연기하는 걸 보는 게 점점 더 재미있다. 가르칠수록 보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매체배우가 연극·뮤지컬무대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대인데 우려도 있다.
“공연예술은 순수 예술보다는 상업 예술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시장 논리를 피할 수 없다. 연극이나 뮤지컬 배우들이 영화나 드라마로 진출하는 것처럼 영화, 드라마 배우들이 연극으로 넘어오는 것도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고 당연한 흐름이다. 중요한 것은 함께 공생하고 공유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일이다. 서로가 가진 역량을 인정하고 기다려 주는 것이 필요하며, 경쟁 속에서 더 나은 무언가를 보여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음악극 노베첸토, 예스24스테이지 2관에서 3월 19일부터 6월 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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