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은 강직한 법관이었다. 간혹 친척이 찾아와 재판에 관한 얘기를 꺼내면 그는 “집안에 대법원장이 둘이냐”고 핀잔을 줬다. 감히 대법원장 앞에서 재판에 관해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경고였을 것이다. 나중에는 법원에 소송이 계류 중인 지인은 아예 방문을 금지해 버렸다. 어느 겨울 친구 아들이 한강에서 낚시로 잡아 선물한 잉어 다섯 마리조차 “만에 하나라도 의심을 받을 수 있다”며 되돌려 보낼 정도로 청렴했다. 가인의 가족 가운데 그 좋다는 대법원장 관용차에 동승해 본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딱 한 번만 차에 태워 달라”는 손자의 간청도 물리칠 만큼 공사의 구분이 엄격했다.

1993∼1999년 사법부를 이끈 윤관 대법원장은 후배 법관들에게 “판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며 “외부로부터 독립도 지켜야 하지만 나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대법원장이 된 것은 김영삼(YS)정부 첫 해였다. YS가 단행한 각종 개혁 조치의 결과 현직 대법원장이 물러나는 등 공직 사회 전체가 뒤숭숭했다. 윤 대법원장은 쓸 데 없는 구설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매일 점심을 구내 식당에서 집무실로 배달시켜 혼자 먹었다. 공식 일정 외에는 외부인과의 만남을 최소화했다. 대법원장에 오르기 전 대법관으로서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겸임한 1989∼1993년 그는 정치인과 단 한 번도 술자리를 갖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영 대법원장(1999∼2005년 재임)은 1965년 판사로 임용된 뒤 40년간 ‘은둔자’처럼 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관이라고 티를 내지 않고 조용히 일만 하는 그에게 ‘판사가 아니라 법원 직원 같다’는 의미로 ‘최 주사(主事)’라는 별명이 붙었다. 최 대법원장이 법원을 떠나고 7개월쯤 지난 2006년 4월 법무법인 바른이 그를 고문으로 영입했다. ‘전직 대법원장이 소일거리가 없어 수개월째 매일 한강변을 배회한다’는 소문을 듣고 취한 조치였다. 최 대법원장은 ‘사건은 일절 맡지 않고 후배들과 얘기하거나 바둑만 둔다’는 조건 아래 이를 수용했다. 그렇게 로펌에 ‘출근’하게 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대법원장 시절 함께 일한 동료 대법관들과의 골프 약속 취소였다. ‘로펌에 몸담은 이상 부적절하게 비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요즘 조희대 대법원장이 공개 석상에서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지난 25일 열린 ‘법의 날’ 기념식에 불참한 것이 대표적이다. 대법원·헌법재판소·법무부·대검찰청·대한변호사협회·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등의 수장이 한자리에 모여 법치주의 확립을 다짐하는 행사인데, 조 대법원장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이는 그가 재판장으로 있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을 심리 중인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정치권 등으로부터 괜한 오해를 사지 않고 재판에만 전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차기 대통령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 후보의 ‘사법 리스크’는 한 개인의 정치적 운명이 걸린 것은 물론 대한민국의 미래와도 직결된 사안이다. 조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머리를 맞대고 6·3 대선 이전에 신속하게 공정한 결론을 도출하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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