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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민주적 정당성이 유효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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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5-19 23:29:48 수정 : 2025-05-19 23:2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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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다음 여행지로 가려고 탄 기차에서 터번을 쓴 구릿빛 피부의 50대 남성이 다가왔다. 야간 열차라 주위에 사람이 적어 긴장이 됐다. 캐리어 손잡이를 잡은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런데 그는 길쭉한 빨간 풍선을 꼬아 만든 하트를 건넸다. 뜻밖의 호의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강매가 아닌가 싶어 다시 경계 모드로 돌아갔다. 순식간의 변화를 알아차린 걸까. 그는 “프리(free·무료)”라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독일 여행 당시의 기억이다.

 

객실 내 승객들에게 풍선을 나눠주며 좋은 여행을 기원한 그 아랍인이 밑도 끝도 없는 경계, 의심의 대상이 된 건 자신과 다른 대상에 대해 가지는 본능적인 거부감에다 선입견이 더해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는 지난 2월 총선 이후 이어진 독일 내부의 분란에 분명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임성균 국제부 기자

총선을 즈음해 독일에서 이민자 관련 흉악 범죄 보도가 잇따르자 독일 국민들은 반이민 정책을 펼치는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연합과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독일을위한대안(AfD)에 표를 몰아줬다. 득표율은 각각 1위, 2위. 특히 AfD는 앞선 총선 때보다 69석이나 늘어 152석을 차지해 제1야당이 됐다.

 

그런데 지난 2일 연방헌법수호청(BfV)이 AfD를 ‘반헌법적 우익 극단주의 단체’로 규정하면서 파장이 일었다. 관련 소식을 전한 보도에는 이민자 범죄가 급증함에도 이민자 수용을 주장하는 정치세력에 대해 비판할 자유를 잃었다, AfD를 지지하는 수많은 민중의 뜻이 묵살됐다, 제1야당에 대한 탄압이다 등의 의견이 들끓었다.

 

민주주의가 선거를 통해 확인된 민의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런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다수의 의사가 언제나 민주적, 윤리적 정당성을 담보하는가라는 의문을 전제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BfV 설립 배경, AfD 주의·주장을 되짚어보면 더욱 그렇다. BfV는 과거 다수의 득표를 바탕으로 집권한 나치가 유대인들을 구분 짓고, 차별을 일삼다 종국에는 학살했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보편적 인권, 민주주의 가치에 도전하는 세력을 선제적으로 찾고, 저지하는 게 임무다. 지금까지 신나치주의를 표방한 국민민주당,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등을 극단주의 단체로 규정했다. AfD는 이민자 수용을 반대하는 것을 넘어 이민자를 ‘혈통적 독일인’과 구분짓고 인종을 근거로 차별적 언사를 공공연하게 일삼았다. BfV는 AfD가 “특정 인구 집단을 동등한 사회 참여에서 배제하고 법적으로 평가절하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해 민주주의 가치와 양립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AfD가 법원에 극단주의 단체 지정 집행정지 소송을 제기하면서, BfV는 극단주의 단체 지정을 잠정 중단했고 법적 판단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다만 그것이 헌법적 질서를 수호해야 한다는 책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민주적 정당성은 다수의 지지라는 형식적 요소뿐 아니라 자유·법치·다원주의 등 실질적 요소까지 포함해야 한다. AfD를 둘러싼 독일 사회의 논란에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지켜나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담겨 있다.


임성균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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