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따라 간 육상부, 인생 바뀌다
속도보다 지구력 탁월… 매일 40㎞ 훈련 견뎌
애틀랜타 올림픽 銀 따며 韓 스포츠 영웅으로
5년 전 찾아온 ‘근육긴장이상증’
허리 굽는 희소병 악몽… “눕는 것조차 고통”
가족들 헌신 속 재활… 4년 만에 극복 성공
25년째 국내 신기록 보유… 아쉬움도
국내 마라톤 인기 반갑지만 韓 기록은 후퇴
마라톤 재단 설립이 꿈… “세계 향해 도전을”
“30분만 내 발로 뛸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전 마라톤 국가대표 이봉주(55)가 지난 7일 경기 용인의 한 카페에서 만나 투병 당시를 떠올리며 한 말이다. 그는 2019년 국가대표 출신 체육인들이 모여 축구 경기를 펼치는 한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서 누구보다 지치지 않은 체력을 과시하며 쉬지 않고 달리는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 꾀부리지 않는 성실한 자세가 때로는 웃음을 자아내면서 옛 은사가 지어준 ‘봉달이’라는 별명과 함께 시청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방송이 아니더라도 여러 마라톤 대회 등 체육 행사에서도 자주 얼굴을 내밀며 국민 마라토너다운 인기를 누렸다. 그러던 그가 2020년 갑자기 대중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들려온 소식은 희소병에 걸려 거동이 힘들다는 것이었다.

눈에서 사라지면 마음에서도 사라진다고 했던가.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이가 많았지만 이봉주는 대중에게서 잊혀져 가고 있었다. 이봉주는 고통 속에서도 재기를 위해 몸부림쳤고 4년 만에 다시 일어섰다. 2024년 가을, 그는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마라톤 행사에서 3.8㎞를 뛰며 다시 달릴 수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 이후 5㎞를 뛰었고 올해 1월엔 일본 가고시마현 이부스키 마라톤 대회에서 12㎞를 달렸다. “아프지 않을 때 매년 나가던 대회였지요. 이 대회는 독특하게 12㎞ 코스가 있어서 도전했습니다.” 기록을 물었다. 이봉주는 “얘기하기 창피하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다시 달릴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행복하다는 표정이었다.
이봉주를 괴롭힌 병은 복근이 지속해서 수축해 허리가 굽는 ‘근육긴장이상증’이다. 처음에는 허리통증이었다. 한의원이나 유명한 병원 등 안 찾아가 본 곳이 없을 정도였지만 병명도 나오지 않다가 나중에서야 진단을 받을 수 있었다. 원인을 모르기에 완치라는 말도 하기 힘든 병이다.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고, 이내 전신이 경직되기 시작했다. 걷는 것도 힘들고, 눕는 것조차 고통이었다. “잠을 거의 못 잤어요. 통증도 통증이지만,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죠. 이대로 나아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뛰는 건 물론 걷기도 쉽지 않아 한때 지팡이와 휠체어에 의존해야 했다. “아내의 부축 없이는 50m도 걸을 수 없었습니다. 면역력마저 급격히 떨어지면서 대상포진으로 고생하기도 했지요. 마치 온몸을 바늘로 찌르는 고통이었습니다.”
이봉주는 2021년엔 6시간이 넘는 척수지주막낭종 제거 수술을 받은 데 이어 신경차단술, 약물치료, 지압침대, 재활운동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가족들의 헌신이 대단했다. 특히 아내는 간병과 육아를 동시에 감당하면서도 매일 굳어가는 그의 근육을 주무르며 곁에서 지켰다. “제가 힘든 것보다 아내가 더 힘들었을 거예요. 제가 많이 미안했죠.”
이봉주는 2023년 말쯤 서서히 몸이 좋아지면서 드디어 운동화를 신을 수 있게 되자 울컥했다. “조금이라도 내 다리로 뛸 수 있다는 게, 그 자체로 기적이었어요.”
이봉주가 병마와의 힘겨운 싸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끈기다. 걷고 달리겠다는 목표를 향해 끈기 있게 치료받았고 조금씩 거동이 가능해지면서부터는 화성의 집 근처 매미산(158m)을 걷기 시작했다. “아프다고 누워 있지 않고 계속 움직였어요. 처음엔 지팡이, 나중엔 스틱을 짚고 걸었지요.”

이봉주의 달리기 인생 궤적을 보면 이런 끈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중학생 때까지는 운동, 특히 달리기에 소질이 없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내내 학교 달리기 경주에서 3등 안에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노트 한 권 상으로 받아본 적이 없다니까요.” 초등학교와 중학교 달리기 경주는 단거리여서 스피드와 순발력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고교 1학년 특별활동 시간에 친구를 따라 우연히 육상부에 발을 들이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자신이 끈기와 지구력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 이후다. “저는 스피드가 강한 선수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느렸죠. 하지만 누구보다 꾸준했고, 끝까지 버티는 힘이 있었어요.”
장점을 발견한 이봉주는 달리기에 푹 빠졌다. 당시 집에서 학교까지 12㎞ 거리를 매일 뛰어 등교했다. “그 시절엔 그냥 재미있었어요. 뛰는 게 신나더라고요. 그러면서 실력이 붙었고, 자신감도 생기고….”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자 육상을 전문적으로 하는 이웃 학교에서 전학을 권유했다. 다만 새로운 학교 소속 선수가 되려면 1년을 유급해야 해 부모님 반대가 심했다. 그는 끈질긴 설득 끝에 전학할 수 있었고, 고3 때 전국체전에서 처음 동메달을 목에 걸며 특기생으로 대학에 갔다. 이봉주는 “턱걸이였다”며 웃었다.
이봉주는 서울시립대에 진학해 서울시청 소속 선수로 뛰면서 본격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대학졸업 후에는 코오롱스포츠, 삼성전자 등 실업을 거치며 국가대표가 됐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며 세계적인 선수로 떠올랐다. “처음 출전한 올림픽이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제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 중 하나였어요. 마지막 3초 차이로 금메달을 놓쳤죠. (3초는 역대 올림픽 마라톤 사상 최소 1·2위 격차다) 지금도 많은 분이 아쉬워하고, 저 역시도 잊을 수 없어요.”
그는 1998년 방콕, 2002년 부산 대회에서 아시안게임 남자 마라톤 2연패도 달성했고, 2001년에는 최고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올림픽도 2000년 시드니, 2004년 아테네, 2008년 베이징 대회까지 4회 연속 출전했다.

다만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생각하면 속이 조금 쓰리다. 몸 상태를 비롯해 준비 상황 등 모든 것이 최고이던 때 출전했고 컨디션도 그 어느 때보다 좋았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레이스 도중 넘어지는 선수와 부딪쳐 본인도 넘어지면서 페이스를 잃었고 24위로 마감해야 했다. “가장 아쉬운 레이스였죠. 아마 제 커리어에서 가장 뼈아픈 순간 중 하나일 거예요.”
이봉주가 이렇게 영광의 시기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매일 40km 이상을 달리는 혹독한 훈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름엔 땡볕에서 뛰고, 겨울엔 한파를 뚫고 뛰었어요. 하루 다섯 시간 넘게 달리는 게 일상이었죠. 그래도 포기하고 싶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현역 시절 이룬 성과로 이봉주는 2022년 대한체육회의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에 헌액되기도 했다. 병세가 한창일 때 수상해 몸은 힘들었지만, 다시 그를 일으키는 데 작지 않은 힘이 됐다.
이봉주는 한국 마라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자부심이 크지만 요즘 우리 마라톤 현실을 보면 아쉬움도 크다. 한국 마라톤의 남자 최고기록은 이봉주가 2000년 도쿄 국제 마라톤에서 세운 2시간7분20초로, 25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현재 세계 신기록은 켈빈 킵툼이 세운 2시간00분35초다. 현재 국내 선수 중 가장 좋은 기록은 박민호의 2시간10분13초다. 세계 신기록은 날마다 빨라지는데, 대한민국 기록은 후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는 후배들에게 “목표를 크게 가지라”고 당부한다. 단순한 참가나 기록을 넘어서, 세계를 향해 도전하라고.

“신체조건이 불리하다는 말 많이 하죠. 하지만 정신력은 누구나 가질 수 있어요. 그걸 믿고 밀어붙여야 해요.”
그래도 요즘 달리기 동호회가 늘어나는 등 마라톤 인기가 높아지는 것은 반갑기 그지없다. “요즘은 달리기가 인기죠. 그런데 서브3(풀코스를 3시간 이내 주파하는 것)와 같이 기록 단축에 집착하는 분이 많아요. 그보다 중요한 건 부상 없이 꾸준히 달리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일반 러너들에게 ‘욕심을 버리라’고 조언한다. 처음엔 걷기부터 시작하고, 차근차근 5㎞, 10㎞, 하프, 풀코스로 올라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달리기를 오래 하려면 무엇보다 몸을 아끼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봉주는 요즘 마라톤 관련 행사에 참여하고, 기업이나 학교에서 특강을 하며 인생 경험을 나누고 있다. 11월에는 베트남 할롱베이에서 열리는 마라톤 행사에 국내 동호인 1000여명과 함께할 계획도 세웠다. 이봉주의 최종 인생 목표는 ‘마라톤 재단’ 설립이다. 후배 선수들을 지원하고, 생활체육 러너들과 교류하는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저는 마라톤으로 많은 걸 얻었어요. 그걸 이제 돌려줄 차례죠.”
몸이 예전처럼 자유롭지 않지만 그의 마음은 누구보다 단단하다. 지금도 달리고, 앞으로도 달릴 것이다. 순발력이 아닌 지구력, 단발적인 폭발이 아닌 지치지 않는 끈기로 정상에 오른 사나이. 이봉주의 질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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