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에 가면 꼭 가는 단골 카페가 있다. 해운대 해안도로 끝(미포)에 있는 ‘엣지 993’. 5층짜리 건물로 1층과 5층, 옥상은 카페이고, 2, 3, 4층은 펜션인 곳. 대천로에 있는 동생 집에서 그곳까지 걸어서 약 30분가량 걸린다. 가는 길 구석구석 이따금 오래된 골목들이 숨어 있어 그 골목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이번엔 아무리 찾아도 그 골목들이 꼭꼭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빌딩들이 생겨나 그 골목들을 지워버린 것이다. 어떤 지역은 골목 때문에 아름답고, 오래오래 그리운 법인데, 그런 곳들이 자꾸 사라지는 것이 쓸쓸하고 왠지 너무 외로워 괜히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명랑해지려 오래 정든 그 길을 걷는다. 그건 마치 내가 쓴 시구(詩句) 위를 아슬아슬 걷는 것처럼 우울하지만.
그래도 여름은 여름이라 역시 바닷가 주변은 피서객들로 북적북적, 번잡하고 소란스럽다. 그 사이를 뚫고 나는 5층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사방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드넓은 바다와 수평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뒤편 언덕 위로 미포와 송정역을 잇는 해변열차와 스카이캡슐이 지나다니고, 그 길 따라 옛 동해남부선 철도 구간을 활용해 만든 해안 산책로(그린레일웨이)가 보인다. 이 길도 송정역까지 쭉 이어져 있다.

오늘은 그 길을 따라 송정까지 걸어갔다가 송정 해변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미포로 돌아올 계획이었는데 관광객들이 의외로 너무 많고, 폭염 속을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카페에 앉아 바다나 실컷 보고 가자로 계획을 바꾸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바다도 기분 좋게 광활하고 아름다우니까.
멀리 수평선 가까이 배 한 척이 보인다. 어릴 땐 저런 배를 보면 저 배가 어디로 가는지, 누가 탔는지, 내 마음대로 상상하며 수평선 너머로 멀리멀리 떠나가는 사람들을 애타게 동경하곤 했는데…. 지금은 담담히 애잔하고 그리운 한 풍경을 바라보듯 바라보고 있다. 마치 에리크 사티가 몽마르트르의 카페 한구석에서 느릿느릿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짐노페디’를 작곡했듯이. 그런 마음으로 그런 음률로.
그게 다 나이 탓이야, 그렇게 말해도 할 말은 없지만, 이제는 ‘느릿느릿’이란 단어가 좋고 ‘깊고, 천천히’란 단어가 주는 의미와 기운이 좋다. 1~2년 사이에 시집 한 권씩 뚝딱 내는 요즘 시인보다는 시집 한두 권으로 일생을 산 옛 시인들이 더 좋고, 여행에 집착하는 사람보다는 한 자리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 더 좋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잃고 수직상승을 위해 분투하는 이 시대, 한 사람쯤은 세상의 끝, 세상의 다른 어디와도 같지 않은 곳에서 그 시대의 예술작품처럼 시처럼 살아간들 어떠리. 누구에게나 소중한 장소가 있듯이 그 장소에 씨를 뿌리고 가꾸는 건 언제나 쓰기라는 긴 파도와 쓰기라는 작은 모래알 사이를 서성이며 수백수천의 사랑이 뒹구는 한여름 밤의 꿈, 그 꿈을 다시 낚아 올려 회상의 그리운 멜로디를 듣고 싶은 것 아닐까.
김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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