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부터 증기 기관차까지 영국이 세계 최초로 발명한 것이 어디 한둘이겠느냐만 공군 역시 영국의 발명품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항공기를 군사 작전에 동원하며 그 장점에 눈을 뜬 영국군은 전쟁 말기인 1918년 4월 육·해군에 각각 속해 있던 항공 부대들을 떼어내 모두 합쳐 공군을 창설했다. 공군이 육군, 해군과 대등한 독립 군종(軍種)이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영국을 필두로 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 강대국들도 속속 공군이 생겨났고,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며 이들은 1차대전 때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주요국 가운데 미국은 2차대전 종전 후인 1947년에야 공군이 탄생해 조금 늦었다.

2차대전 초반인 1940년 6월18일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가 굳은 표정으로 하원의원들 앞에 섰다. “프랑스 전투(Battle of France)는 끝났다”고 선언한 그는 “나는 영국 전투(Battle of Britain)가 시작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단언했다. 나치 독일의 군홧발에 짓밟힌 프랑스가 항복을 선언한 직후였다. 다만 처칠이 말한 ‘영국 전투’의 정확한 모습이 무엇일지는 당시만 해도 불분명했다. 세계 최강의 육군을 거느린 독일이 영불해협을 건너 섬나라 영국에 상륙작전을 시도할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인 가운데 역시 세계 최강의 해군을 거느린 영국이 과연 독일 함대의 진입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독일 해군이 주저하는 사이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측근인 헤르만 괴링 공군 원수가 나섰다. 그는 “전투기와 폭격기로 영국의 군항, 비행장 등 군사 시설을 파괴하고 제공권을 장악하면 상륙작전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윽고 1940년 8월 ‘독수리 공격’이란 이름이 붙은 독일 공군의 대규모 작전이 시작됐다. 영국 공군은 말 그대로 선방했다. 프랑스는 망했고 미국은 아직 참전하지 않은 그 시절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우는 자유 진영의 전사는 영국 공군 조종사들뿐이었다. 훗날 처칠은 “인류의 전쟁터에서 그렇게 적은 사람들(조종사)에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큰 빚을 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찬사를 바쳤다.

영국 공군의 앨런 마샬 항공우주사령관(중장)이 지난 5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방문했다. 영국은 6·25 전쟁 당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연인원 5만6000여명을 한국에 파병했고, 그중 1000명 넘는 인원이 전사했다. 기념관 운영 주체인 전쟁기념사업회 백승주 회장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희생한 영국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헌신을 우리 국민은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비록 영국은 6·25 전쟁에 공군 부대를 보내진 않았으나, 우리 역시 처칠의 말대로 영국 공군에 큰 빚을 지고 있다. 2차대전 당시 영국 공군이 독일 공군에 무너졌다면 우리의 광복도 훨씬 더 늦어지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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