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발발 약 1년 전인 1949년 6월20일 서울 용산에서 신생 대한민국 육군의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 창설식이 열렸다. 오늘날 ‘수방사’라는 약칭으로 더 잘 알려진 육군 수도방위사령부와는 전혀 별개의 부대다. 수도 서울을 적으로부터 지킨다는 임무는 비슷하나, 군단급 규모로 휘하에 정예 사단을 여럿 거느린 수방사와 달리, 옛 수경사는 사단급 부대로 보유한 장비도 박격포 등 낡은 구식 무기들뿐이었다. 오늘날의 수방사는 5·16 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6월1일 만들어진 부대다. 정변에 성공한 박정희 장군 등 군부 세력이 ‘다시는 이번처럼 군대가 서울로 진격해 정권을 무너뜨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교감 아래 신설을 밀어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 수경사는 북한의 6·25 기습 남침 사흘 만에 서울이 북한군 수중에 떨어지는 등 혼란 속에 ‘수도사단’으로 개편이 됐다. 경기도, 충청도 등으로 후퇴를 거듭하면서도 북한군 선봉 부대와 맞서 용맹히 싸움으로써 적의 진격을 최대한 처지하는 전공을 세웠다. 1950년 9월 미군 등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며 수도사단은 유엔군과 더불어 북진에 나서 함경남도 청진에 도달했다. 수도사단은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떠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6사단과 더불어 ‘6·25 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을 통틀어 가장 북쪽까지 진출한 부대’로 통한다.
1964년 박정희정부는 공산주의 월맹(북베트남)에 맞서 싸우는 자유주의 월남(남베트남)에의 파병을 결정했다. 이듬해인 1965년 사나운 호랑이를 부대 마크 삼은 이른바 ‘맹호부대’가 베트남으로 떠났으니 이들의 주축이 바로 수도사단 용사들이다. 그 공로를 인정받은 수도사단은 월남 철수 이후인 1973년 한국 육군 최초의 기계화부대로 재편성되는데, 그때 붙여진 ‘수도기계화보병사단’(수기사)이란 명칭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맹호부대란 별명으로 더 유명한 수기사 군가에는 ‘함흥에서 길주 청진 혜산진까지 피흘려 싸워온 빛나는 수기사단’(6·25 전쟁 당시 전공)과 ‘자유의 부름 받아 200만리 월남 땅에 힘차게 진군한 불퇴전의 맹호 용사’(베트남 전쟁 당시 전공)라는 가사가 들어 있다.

지난 4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9월의 호국 인물’로 선정된 권준(1895∼1959) 장군을 기리는 현양 행사가 열렸다. 장군은 일제강점기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조국 광복의 그날까지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의열단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서도 활약하며 제국주의 일본에 맞서 싸웠다. 1948년 한국 정부 수립 후로는 육군에 투신해 오늘날 수기사의 전신인 옛 수경사 초대 사령관을 지내고 1956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는 등 창군(創軍)에도 혁혁히 기여했다. 이에 정부는 1968년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날 현양 행사에는 고인의 유족 외에 특별히 김성구 현 육군 수기사 사단장(소장)이 참석했다. 김 사단장은 “우리 사단의 모체인 옛 수경사 초대 사령관이 권준 소장님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권 소장님을 적극적으로 알려 부대원들이 자긍심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김 사단장의 다짐이 꼭 결실을 거두길 고대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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