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적 연대 속에서 독생녀 탄생의 길을 열다
오늘날 세계 인구 80억 가운데 기독교 24억, 이슬람 20억 등 절반 이상은 유일신 사상을 강조하며 하나님(알라)을 창조주, 심판주로 믿는다. 예수에 대해 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신성과 인성을 가진 독생자라고 받아들이고, 이슬람은 예언자로 자리매김하면서 신성을 부정한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는 독생녀를 신성과 인성을 가진 하늘부모님의 여성적 구원의 실체로 규정한다. 한민족은 일제강점기의 고난 속에서도 독립과 평화를 향한 내적 기대를 키워갔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에 따르면 그 기대는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것이고,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국제사회의 기반과 함께 조성되었다.
한민족의 신앙과 민족적 의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안한 ‘민족자결주의’ 소식은 한민족에게 큰 희망이 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계기로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을 더욱 구체화했고, 민족 지도자들은 이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1919년 세 차례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중국 길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 일본 동경에서 발표된 ‘2·8독립선언서’, 그리고 서울에서 발표된 ‘3·1독립선언서’가 그것이다.
특히 ‘대한독립선언서’는 한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다. 선언서에서는 한민족의 국호 ‘대한(大韓)’과 역사적 정신 ‘한(韓)’이 연결됨을 강조하며, 조선 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배경과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밝혔다. 이승만과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를 통해 한민족이 스스로 나라를 옹호하고, 만방과 화협하며 세계와 함께 나아갈 능력을 가진 민족임을 천명하였다. 선언서는 한민족의 내치와 외교, 자연과 문화, 공동체 자산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민족적 권리와 정통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중요한 문서였다.
이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전국적인 비폭력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선총독부 기록에 따르면, 약 106만 명이 참여했고 9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4만 7천여 명이 구속되는 등 막대한 희생이 뒤따랐다. 그러나 한민족은 폭력 대신 평화적 방법으로 자주독립을 선언하며, 인간의 도덕적 각성과 평화 국가를 향한 열망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였다.
3·1운동은 한민족이 ‘평화’와 ‘민족적 공의’를 중심으로 정체성을 확인하고, 문화적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정신은 대한민국 건국과 국가 정체성 확립의 기반이 되었으며, 한민족이 고난 속에서도 신앙과 민족적 의지를 통해 스스로를 지켜온 역사적 경험을 잘 보여준다.
종교 간 화합으로 평화 국가의 기반을 닦다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3·1운동은 정치적 저항 이상으로 인류 전체의 통합과 평화를 지향하는 국가적 기대를 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기독교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 지도자들은 재림메시아 실현을 위한 신앙적 열망과 민족적 목표를 함께 추구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한(韓)’의 역사는 독생녀 탄생을 중심으로 새로운 역사를 펼칠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3·1운동은 종교 지도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대표적 사례였다. 천도교의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은 비폭력적 시위를 통한 독립운동 방법을 마련하고, 이를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기독교·불교·유림 등 다양한 종교 지도자들을 민족대표로 참여시키는 합의를 이뤘다. 기독교 지도자 이승훈 등이 참여하면서 교회는 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고, 한용운 등의 불교 지도자까지 참여해 초종교적 연합이 성사되었다.
이러한 종교 간 협력과 화합은 한민족 내 평화적 열망과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며, 자연스럽게 독생녀 탄생을 위한 종교적 기반으로 연결된다. 각 종교 지도자들의 연합은 국가적 차원에서 평화와 통합의 이상을 구현하는 장이 되었고, 민족적 목표와 신앙적 기대가 하나로 결합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3·1운동의 결과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한국 최초의 민주 공화정 정부로서,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기 위한 외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42년 3월 1일 임시정부는 미국, 영국, 소련, 중국에 공식적으로 정부 인정을 요청하였으며, 중국의 정식 인정을 받음으로써 국제적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은 조선 패망 후 나라를 잃은 한국민들에게 새로운 국가 창건에 대한 희망을 제공했으며, 독립을 위한 투쟁의 불씨를 이어갔다. 또한 하늘이 예비한 선민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의 근본 토대가 되었고, 민족적 자주성과 신앙적 기대가 결합된 국가적 비전의 실현을 가능하게 했다.
한편, 국제적 맥락에서도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세계적 평화와 자유를 향한 흐름과 맞물렸다. 1942년 1월 1일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 26개국이 공동 전쟁 목표와 전후 평화 질서 구축을 선언하면서 평화와 국제적 협력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어 1943년 이탈리아가 패배하면서 전쟁의 전세가 연합국 쪽으로 기울자,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세계적 변화 속에서 독립에 대한 기대를 키워갔다.
연합국 26개국의 공동선언선언은 전 세계가 협력해 항구적 평화 사회를 구현하고 인류의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비전을 담고 있다. 이러한 세계적 흐름은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결합하며, 독생녀 탄생을 위한 국가적·세계적 기대를 동시에 형성하는 배경이 되었다.
현대사·세계적 기반 속 독생녀 탄생 준비
3·1운동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가 조직된 것처럼, 1943년에는 여성 독립운동가 50여 명이 모여 대한애국부인회를 재결성하였다. 이 모임에는 대부분 기독교 여성들이 참여했다. 이러한 민족적·종교적 기반 위에서 하늘부모님은 독생녀 현현을 준비해 왔다고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는 강조한다.
한반도는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물러간 자리를 미·소 양국 연합군이 대신하며,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는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정되어 남한과 북한은 각각 미군과 소련군 주둔 하에 우익과 좌익, 반탁과 찬탁으로 갈리며 이념적 대립을 겪는다. 김구 등 민족 지도자들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남북한은 단독정부를 세우면서 분단국가로 남게 되었다.
1950년 북한 정권은 한반도 공산화를 목표로 남한을 침략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3일 만에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며 남하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유엔군이 참전하게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최후의 결전을 벌였으며, 그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넘어 북진하였다. 평양과 흥남까지 진격했으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다시 후퇴해야 했고, 결국 1953년 3년여간의 전투 끝에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한국전쟁에서 유엔 16개국의 젊은이들이 참전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보기 드문 기적 같은 일이다. 단일 민족 국가의 분쟁에 세계 각국이 힘을 모아 참전한 것은 국제정치적 이해관계로만은 설명하기 어렵다. 이는 하늘부모님의 깊은 뜻과 섭리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사건으로 평가된다. 그들의 희생은 단순히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독생녀가 참어머님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보호하고 양육하는 섭리적 의미를 지녔다고밖에 볼 수 없다. 따라서 한국전쟁과 유엔군 참전은 한민족의 역사 속에서 국가적·국제적 기반과 신앙적 기대가 결합하여 독생녀 탄생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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