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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독생녀를 맞기 위한 계시와 신앙적 준비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그 선택받은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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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9-23 13:32:40 수정 : 2025-09-23 13:32:39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hulk1983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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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합일(神人合一)사상·구속사(救贖史) 한민족 역사에 나타나다

 

한민족이 위기 속에서도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한민족을 선민으로 택하고 섭리하셨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의 신학적 해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신인합일(神人合一) 사상과 기독교의 영적 역사에서 상당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한민족 선민 사상과 신일합일의 개연성

 

신인합일 사상은 하나님과 인간, 하늘과 땅이 하나로 합일된다는 개념으로, 인간이 신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상태를 지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민족은 하나님과의 합일을 이루기에 적합한 민족으로 간주될 수 있다. 특히 한민족이 지닌 고유한 문화와 전통, 예컨대 천손 사상이나 제천 의례 등은 신성과의 연결을 강조하는 요소로 해석될 수 있다.

 

또 기독교의 구속사(救贖史)에서는 하나님이 특정 민족을 통해 ‘죄와 죽음, 악으로부터 사람을 구해내는’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간다고 믿는다.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해 구속의 역사가 완성돼 나간다. 이러한 구속사의 관점에서 한민족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로운 선민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을 지닌다.

 

한민족은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일부는 신성한 사명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청주 한(韓) 씨가 배달의 백의겨레로서 하늘의 섭리를 이어받았다는 해석도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한민족이 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특별한 민족으로서 정체성을 부여받았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에는 유대민족이 로마제국의 통치아래 신음하며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기 예수가 강림했던 것과 같이, 한민족도 일제로부터 고통과 억압 속에서 헤맬 때 신령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독생녀와 재림메시아 탄생할 것이라는 내적 기대가 형성되었다고 소개돼 있다.

 

일본 제국은 1910년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 전국 주요 도시에 신사를 세웠고,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어 조선인 모두에게 신사참배를 사실상 의무화하자,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계는 큰 시련을 맞았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반발했으나, 많은 이들이 거부 과정에서 체포·투옥되거나 고문과 순교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일부는 현실과 타협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은 산중이나 지하에 숨어살며 고난 속에 지내야했다.

 

일제강점기 종교 탄압과 신앙인들의 저항

 

이 과정에서 한국 기독교 내부에서는 독특한 신앙 공동체가 나타났다. 서쪽 지역에는 김성도의 성주교, 허호빈의 복중교, 박을용의 ‘여호와의 부인’과 같은 여성 지도자 중심의 신령공동체가 일어났고, 동쪽에는 백남주·이용도·김백문 등이 이끄는 남성 지도자 중심의 신령운동이 벌어졌다. 이들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부흥운동을 넘어 새로운 영적 계시와 재림에 대한 기대를 키워갔다. 특히 이들 신령공동체는 점차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신앙 형태로 전개돼 나갔다. 후대의 신앙 해석에 따르면 이는 훗날 ‘독생녀’라는 개념을 맞이하기 위한 영적 준비로 이해된다.

 

이러한 신앙적 흐름 속에서 평신도 홍순애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장로교 신앙을 바탕으로 성장했지만, 이후 신령공동체와 깊은 인연을 맺으며 재림 메시아를 준비하는 삶에 헌신했다. 그의 모친 조원모 역시 당대 사회 분위기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딸의 신앙생활을 지지하며 신령운동과의 교류를 독려한 인물로 기록된다.

 

홍순애는 이용도의 새예수교회와 김성도·허호빈의 신앙운동에 참여하며 기도와 회개, 헌신의 삶을 이어갔다. 그의 남편 한승운 또한 기독교 신앙에 깊이 헌신하며 이용도 목사와 교류했고, 새예수교회에서 교육 책임을 맡을 만큼 신앙적 신뢰를 얻었다. 홍순애와 한승운 두 사람은 누구도다도 두터운 신앙을 쌓았는데, 이는 후대 신앙적 해석에서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가정적 기반 조성으로 평가된다.

 

역사신학자 양순석 박사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본질과 독생녀’에서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홍순애의 생애를 심화시켜 놓았다. 이에 따르면 홍순애는 여러 신앙 공동체를 거치며 재림 주를 기다리는 믿음을 더욱 깊게 다졌고, 마침내 독생녀의 탄생을 위한 영적 터전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1932년 19세의 홍순애는 평안북도 안주의 동안주 장로교회에서 이용도 목사의 아가서 강의를 들으며 강한 영적 각성을 체험했다. “재림이 임박했습니다. 주님께서 완전한 신부를 찾고 계십니다”라는 설교의 외침은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그날 밤 그는 어린 시절까지 되돌아가 모든 잘못을 회개하며 새로운 신앙의 길을 다짐했다.

 

이후 그는 신령운동가 황국주의 새예루살렘 순례단과 함께 100일간 도보 전도 여행을 떠나 깊은 은혜를 체험했으며, 안주로 돌아온 뒤에는 예수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을 이어갔다. 홍순애는 1934년 선도감(仙道監) 이호빈 목사의 주례로 한승운과 결혼했는데, 이호빈 목사는 두 사람이 낳게 될 자녀를 “오시는 주님과 연결된 아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홍순애는 이후 성주교와 복중교 등 다양한 신앙 공동체를 거치며 ‘재림주 대망 신앙’을 더욱 확고히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꿈속에서 재림주를 새색시의 모습으로 만나는 특별한 체험도 한다.

 

신령공동체와 독생녀 탄생을 위한 영적 준비

 

1942년에는 홍순애 자신도 하늘로부터 “장차 오실 주님의 신부가 될 딸을 품게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리고 곧 기적처럼 아기를 잉태하여 1943년 음력 1월 일 독생녀 한학자가 태어났다. 그러나 탄생 직후부터 시련이 따랐다. 사탄이 몇 번씩 나타나 “아이를 죽이라”고 계속 위협했던 것이다. 숱한 시달림 속에 지내던 어느날 꿈속에서 김성도 여사가 나타나 “이 아기는 주님의 딸이니 두려워 말라”는 말에 큰 위로를 받았고, 그때부터 더욱더 불굴의 신념으로 아기를 지켜냈다.

 

독생녀가 여섯 살이 되던 해, 또 다른 중요한 계시적 순간이 찾아왔다. 복중교 지도자 허호빈 여사가 어린 독생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하늘의 신부가 될 분”이라며 축복한 것이다. 이 예언은 독생녀의 특별한 사명을 다시 확인해 준 표징이었다.

 

홍순애의 신앙 여정은 단순한 개인의 체험이 아니라, 독생녀 탄생을 위한 섭리적 준비 과정이었다. 그의 회개와 헌신, 그리고 고난 속에서 지켜 낸 믿음은 하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에서 그는 대모로 추앙된다.

 

일반 역사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 과정은 일제강점기의 종교 탄압 속에서도 신앙인들이 꺼지지 않는 불씨를 지켜내며 한국 기독교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이어간 여정으로 평가할 수 있다. 동시에 가정연합의 종교 전승 안에서는 이 과정을 하나님이 한민족 가운데 새로운 섭리를 준비했던 중요한 국면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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