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남정훈 기자] 지금으로부터 시계를 12년 전으로 돌려보자. 당시 여자 프로배구 도로공사에는 날개 공격수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황민경(現 IBK기업은행)을 필두로 김선영(은퇴), 표승주(은퇴), 김미연(現 GS칼텍스), 문정원, 곽유화(은퇴), 고예림(現 페퍼저축은행)까지. 괄호 옆 수식어를 보면 알겠지만, 지금까지 도로공사에 남아있는 선수는 딱 한 명. 문정원 뿐이다. 왼손잡이 아포짓 스파이커였던 문정원은 2011~2012 신인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4순위러 지명받아 도로공사에 입단했다. 지명 순위만 보면 프로에서 살아남기는 쉽지 않았다. V리그에서 외국인 선수를 아포짓 스파이커 포지션을 뽑기 때문에 1m74의 단신인 문정원이 이들과의 경쟁을 이겨내기는 힘들었다. 입단 후 세 시즌은 웜업존을 지키는 시간만 길었다.
프로 데뷔 네 번째 시즌이었던 2014~2015시즌, 문정원은 마침내 주전급 선수로 도약했다. 비결은 리그 최고 수준의 서브와 아포짓 스파이커임에도 리베로 뺨칠 정도로 뛰어났던 리시브 능력 덕분이었다. 코트 가장 뒤쪽 구석에서 달려들어와 때리는 문정원의 서브는 곧바로 도로공사의 상징 중 하나로 자리잡았고, 문정원은 그해 세트당 0.56개의 서브득점으로 이 부문 2위를 차지하며 도로공사의 한 축을 당당히 차지했다.
세터의 대각에서 공격적인 역할을 맡는 기존의 아포짓과는 달리 리시브와 수비, 서브에서 팀에 공헌하는 ‘리시빙 아포짓’으로 10시즌을 보낸 문정원은 2025~2026시즌부터 새로운 포지션에 도전하고 있다. 수비 전문 선수, 리베로다.
워낙 빼어난 수비력을 자랑해 국가대표에도 리베로로 뽑혀 활약한 적은 있지만, 프로에서 리베로로 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왜냐하면 리베로로 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옆에는 ‘최리’(최고의 리베로)라는 별명을 보유한 현역 최고의 리베로 임명옥(IBK기업은행)이 파트너로 있었기 때문이다.
임명옥-문정원의 리시브 라인은 도로공사의 강점이었다. 리시브 1,2위를 독식할 정도로 두 선수가 독보적인 리시브 능력을 자랑하다 보니 도로공사는 ‘2인 리시브’ 전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공격력은 리그 최고지만, 리시브 능력이 다소 아쉬운 박정아와 임명옥-문정원의 ‘2인 리시브’의 궁합은 그야말로 찰떡이었다. 박정아의 도로공사 입단 첫해인 2017~2018시즌, 그리고 도로공사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2022~2023시즌에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임명옥-문정원이 코트 후방에서 워낙 든든히 받쳐줬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임명옥-문정원의 최강 리시브 라인은 지난 시즌을 끝으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FA 자격을 얻었던 임명옥에게 샐러리캡 문제로 제대로 된 계약을 제의할 수 없었던 도로공사가 그를 사인 앤드 트레이드로 IBK기업은행으로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팀 사정 때문에 결국 문정원이 리베로로 변신하게 됐다.
리베로로 보내는 첫 시즌이지만, 워낙 수비적인 재능이 뛰어나서일까. 문정원은 곧바로 리그 최정상급의 리베로로 군림하고 있다. 임명옥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문정원은 압도적인 기록을 뽐내며 수비 관련 지표에서 최상단을 차지하고 있다. 전매특허인 리시브는 47.40%의 효율로 임명옥(46.36%)을 제치고 리그 전체 1위다. 디그는 세트당 5.162개로 임명옥(세트당 5.750개)에 이어 2위. 리시브와 디그를 합친 수비는 세트당 7.378개로 임명옥(세트당 7.344)에 근소하게 앞선 1위. 도로공사의 파죽지세의 숨은 공신은 문정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9일 화성종합체육관에서 열린 IBK기업은행과의 2라운드 원정 경기에서도 문정원의 수비력은 빛을 발했다. 문정원의 리시브가 워낙 안정적이다 보니 IBK기업은행 서버들의 서브는 주로 강소휘에게 쏠렸다. 문정원은 6개를 받아 4개를 정확하게 세터 머리 위로 연결했다. 효율은 66.67%. 대신 디그에서 팀 내 최다인 19개(20개 시도)를 성공하며 코트 후방은 든든히 지켰다. 문정원의 활약 속에 도로공사는 세트 스코어 3-0 완승을 거두며 개막전 패배 후 8연승 행진을 달렸다. 당연히 리그 단독 선두다.
경기 뒤 세터 이윤정과 수훈선수로 인터뷰실에 들어선 문정원은 리베로 변신 후 대활약에 대해 “아직 부족하죠. 명옥 언니를 보면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명옥 언니뿐만 아니라 다른 팀 리베로들의 영상도 많이 찾아보고 있어요. 아직 팀원들과 맞춰야 할 게 많아요. 리베로 전향 처음이다 보니 수비 방향이나 리시브 방향 등이 어색할 때도 있고요”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리시브, 디그 등에서 1,2위를 달리고 있다’라고 묻자 “제가 기록을 보고 하는 편이 아니라서요. 팬들이 말해줘서 기록을 알게 될 때가 많아요. 감독님이 그동안 명옥 언니와 함께 해서 리베로에 대한 기대치가 높거든요. 동기부여도 되고, 더 잘 해야지하는 마음도 커요”라고 답했다.
오늘의 문정원이 있게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서브에 대해 물었다. ‘이제 서브 때릴 일이 없어서 아쉽지 않냐’고 묻자 “아니요. 욕심은 전혀 없어요. 그동안 원없이 서브를 때렸잖아요. 올해는 리베로를 한다고 마음 먹었기 때문에 전혀 아쉽지 않아요. 이젠 서브를 정확하게 받는 데에 집중해야죠”라고 답했다.
도로공사가 1라운드를 1위로 마친 건 15년 만에 처음이다. 그동안 우승을 차지한 시즌에도 1라운드는 5할 승률, 혹은 5할에 미치는 못하는 성적을 거뒀던 전형적인 ‘슬로우 스타터’였던 도로공사에게 이례적인 행보다. 문정원은 “신기하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해요. 저희가 슬로우 스타터였던 게 사실 우승의 원동력이기도 했죠. 그만큼 리그 후반에 강하다는거니까. 작년에도 성적 안 좋았지만, 리그 후반에 ‘고춧가루 부대’ 역할을 톡톡히 했으니까요. 올해는 처음부터 잘 하고 있으니 끝까지 잘 해내겠습니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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