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 후 대출 시도까지…‘계획 범행’은 부인
교제살인 증가 추세…관련 입법공백 지적도
자신의 채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귄 지 한 달 된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20대 남성이 첫 재판에서 혐의를 인정했다. 교제 살인이 반복되자 가해자에 대한 실시간 전자 감시 제도 등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14일 법조계에 따르면 수원지법 안산지원 제1형사부(부장판사 정경희)는 지난 11일 강도살인 및 시체유기 혐의로 구속기소 된 A(26)씨의 첫 공판을 진행했다. A씨는 지난해 12월28일 오후 9시40분쯤 경기 안산시 단원구 한 주택가에 차량을 세운 뒤 동승하고 있던 20대 여자친구 B씨를 주먹 등으로 수차례 폭행하고 목을 졸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후 경기 포천시 소홀읍 일대 고속도로 가드레일을 넘어 나무가 우거진 곳에 시신을 유기한 혐의도 받는다.
A씨는 2024년부터 불법 온라인 도박 등으로 채무에 시달리다 B씨에게 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건 당일 폭행을 당하던 B씨가 휴대전화를 이용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려 하자 휴대전화를 빼앗아 차량 뒷좌석으로 던져 제지한 것으로 파악됐다.
범행 이후 A씨는 B씨 계좌에서 자신의 계좌로 돈을 이체하려 했지만 비밀번호를 알지 못해 실패했고, B씨 명의로 대출을 시도했으나 보이스피싱 의심으로 차단돼 실제로 확보한 돈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두 사람은 사건 당시 약 한 달간 교제한 사이였다.
A씨 측 변호인은 법정에서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면서도 “처음부터 강도 목적으로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휴대전화를 빼앗은 것도 외부 연락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연락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던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전을 노린 강도살인이 아닌 우발적 살인에 가깝다는 주장이다. 재판부가 “변호인 의견에 동의하느냐”고 묻자 A씨도 “그렇다”고 답했다.
반면 검찰은 A씨 차량 블랙박스와 범행 장소 일대 폐쇄회로(CC)TV 영상, 휴대전화 포렌식, 금융거래 내역 등을 토대로 A씨가 B씨의 돈을 빼앗기 위해 계획적으로 범행했다고 보고 있다. 강도살인이 인정될 경우 무기징역까지 선고될 수 있지만, 단순 살인은 징역 수십년 수준의 형량이 선고되는 경우가 많다.
숨진 B씨는 2년 전 아버지가 지병으로 사망한 뒤 할머니를 홀로 부양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은 A씨에 대한 엄벌을 촉구하고 있다. B씨 유족은 “고작 한 달을 사귀었는데 그렇게 분노를 주체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을까 싶다”며 “그저 연인을 만나는 일에 죽음까지 무릅써야 하는 거냐”고 분노했다.
A씨에 대한 다음 공판은 오는 25일 열릴 예정이다.
한편 부부나 연인 등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관계성 범죄 신고는 지난해 역대 최다를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 경찰청에 따르면 가정폭력·교제폭력·스토킹 등 관계성 범죄에 대한 112 신고는 지난해 43만9456건으로, 2024년(35만6988건)보다 23.1%(8만2468건) 증가했다. 성평등가족부가 공개한 ‘2025 여성폭력통계’를 보면 2024년 기준 전·현 배우자, 연인 등 친밀한 관계에 있던 이를 살해(미수 포함)한 범죄자 중 75.8%가 남성이었다.
이날도 스토킹 피해에 시달리던 20대 여성이 경찰의 보호조치 대상자임에도 사실혼 관계였던 남성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40대 남성 C씨는 이날 오전 8시58분쯤 경기 남양주시 오남읍의 길거리에서 과거 동거했던 20대 여성을 흉기로 수차례 찌른 뒤 차량을 타고 도주했다 1시간여 만에 양평군 양서면의 국도변에서 붙잡혔다.
C씨는 과거 성범죄로 전자발찌를 착용한 상태였으나 범행 후 훼손하고 도주한 것으로 조사됐다. 피해 여성과는 과거 동거하면서 여러 차례 폭력을 휘둘러 가정폭력처벌법상 임시조치 2·3호와 스토킹처벌법상 잠정조치 1·2·3호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숨진 여성은 스마트워치를 지급받은 상태였으나 교제 살인은 막을 수 없었다.
이별을 통보한 여자친구를 살해한 김레아 사건이나 경찰에 수차례 신고가 접수되고도 가해자를 분리 조치하지 않았던 거제 교제폭력·사망 사건 등 유사한 사건은 매해 반복되고 있다. 특히 2016년부터 교제폭력 관련 법안이 국회에 꾸준히 발의됐지만, 11년째 입법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스토킹과 가정폭력의 경우 각각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과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있지만 교제폭력의 경우 이를 명확히 규정하고 적용할 수 있는 법률이 없어 제도적 공백이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박상민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경찰청 치안정책 관련 리포트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경우 피해자의 개인정보나 취약점을 악용해 지속·반복적으로 범죄가 행해지는 특성이 있고, 통제와 집착 등으로 인해 살인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한 경우 가해자의 접근금지 조치와 같은 조기 개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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