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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지금 여기에… 히말라야 속 은둔의 왕국 ‘21세기 달마시티’ 꿈꾸다 [S스토리-겔레푸 '마음챙김 도시' 건설하는 부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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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납지·붐탕(부탄)=글·사진 박성준 선임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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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전체가 사원… 불심 가득
구루 린포체 순례길 재단장
GMC 프로젝트 야심찬 계획
자연·명상공간·불교 중심축

BIG 그룹 설계한 국제공항
산맥 연상… 전통과 미래 조화
“속도 아니라 방향성이 중요”
새 경제특구 긴 호흡 작업중

활주로에서 날아오른 소형여객기 왼편으로 히말라야 산맥이 펼쳐진다. 만년설로 뒤덮인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지며 시야를 가득 채운다. 네팔 카트만두에서 ‘은둔의 왕국’ 부탄으로 가는 한 시간 남짓 하늘길이다. 숨이 멎는 장관이다. 기내방송에선 에베레스트(해발 8848m), 로체(8516m), 칸첸중가(8586m)로 이어지는 봉우리를 기장이 소개한다. 좁은 객실 창으로 만나야 하지만 형언하기 힘든 감동이 일어난다.

시리도록 하얀 설산이 시야 끝까지 펼쳐진 ‘지구의 지붕’을 뒤로 한 비행기는 S자형 착륙을 시작한다. 산맥을 따라 지그재그로 비행하다 마지막 협곡을 끼고 비행기는 급격히 선회하며 내려앉는다. 현지어로는 ‘뇌룡(雷龍)의 땅(드룩 율)’인 부탄을 처음 만나는 순간이다.

네팔에서 카트만두에서 파로로 가는 항공편 왼쪽 객석에서 볼 수 있는 히말라야 산맥. 구름 아래에서 지평선까지 만년설 연봉이 이어진다.
네팔에서 카트만두에서 파로로 가는 항공편 왼쪽 객석에서 볼 수 있는 히말라야 산맥. 구름 아래에서 지평선까지 만년설 연봉이 이어진다.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공항을 빠져나오면 상쾌한 풍경이 펼쳐진다. 공항으로 가족을 마중 나온 현지인들 모습에선 옛날 김포국제공항 풍경이 떠오른다. 맞은편 언덕에는 이국만리로 떠나는 이가 탄 비행기를 향해 손을 흔들고 눈물을 적시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 전망대도 있다. 부탄왕실불교협회 초청 한국순례단의 불교 유적지 답사는 지난달 22일 이렇게 시작됐다.

파로 종 안뜰에서 열린 파로 체추 축제. 황금색 치마 의상을 걸치고 가면을 쓴 승려들이 가면무를 공연하고 있다.
파로 종 안뜰에서 열린 파로 체추 축제. 황금색 치마 의상을 걸치고 가면을 쓴 승려들이 가면무를 공연하고 있다.

◆불심(佛心)의 나라, 부탄

“부탄은 절이 많은 나라가 아닙니다. 나라 전체가 절입니다.” 부탄 현지에서 만난 한국인 표현대로 히말라야 깊숙이 자리 잡은 이 작은 왕국은 불심으로 가득 찬 정토(淨土)국이다. 공항 인근 라캉(사찰)에서 ‘무사히 일과를 마쳤다’고 기도하는 승무원을 다시 만날 정도로 국민 불심은 깊고 넓다.

붐탕 자카르 종 법당에서 예불 중인 어린 승려들.
붐탕 자카르 종 법당에서 예불 중인 어린 승려들.

부탄 불교의 중심은 8세기의 구루(스승) 린포체다. ‘파드마삼바바’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린포체는 인도에서 히말라야로 건너와 부탄 곳곳에서 수행하며, 토착신을 무찌르고 미래를 위한 가르침(테르마)을 숨겨 두었다. 이번 순례의 길이 바로 그 발자취다. 구루 린포체의 여정을 따르는 ‘로투스 본 트레일’로 아열대 숲에서 히말라야 고산 삼림지대까지 167㎞에 걸쳐 있다. 예로부터 알려진 순례길이지만 부탄 왕실이 지난해부터 이 길을 단장하고 개발 중이다.

파로 공항 입국장을 나서면 탁 트인 산야를 배경으로 서 있는 여신 모습 불상이 이방인을 맞이한다.
파로 공항 입국장을 나서면 탁 트인 산야를 배경으로 서 있는 여신 모습 불상이 이방인을 맞이한다.

◆21세기 달마시티

린포체의 발자국이 시작된 곳은 남부 겔레푸. 파로에서 다시 국내선 경비행기로 한 시간을 더 날아 도착한 이곳에서 부탄은 국가의 미래를 걸고 겔레푸 마음도시(GMC)를 건설 중이다. 세계 불교문화의 중심으로 거듭나려는 ‘21세기의 달마(達磨)시티’는 자연과 명상 공간, 불교 프로젝트를 도시의 중요한 축으로 삼는다. 세계적 설계그룹 BIG의 건축거장 비야르케 잉엘스가 기획·설계를 맡았는데 금강승 명상센터, 동서양 통합 의료센터, 대학, 수경 농장, 문화센터, 부탄 직물 시장 등이 들어선다. 또 도시 서쪽 끝 수력발전 댐은 계단식 사원을 겸하도록 설계됐다.

또다른 GMC프로젝트인 순례길 건설 현장에선 지그메 케사르 국왕이 순례단을 만났다. 국왕은 GMC에 대해 “이 도시는 이미 여기 있다. 흙 속에, 여러분이 숨 쉬는 공기 속에, 우리 위의 하늘 속에. 그것을 열어내는 일만 남았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부탄 불교의 테르마(숨겨진 보물) 개념을 빌려 전통의 재구성을 통해 미래를 세우겠다고 설명한 것이다. 국왕은 “한국에서도 불교 센터를 하나 이곳에 세웠으면 좋겠다”는 당부를 했다.

드넓은 잔디 광장에 높은 당간지주 세 개가 세워진 붐탕 자카르 종 안뜰. 7세기 송첸 감포가 세운 사원으로 부탄 불교의 역사적 심장부다.
드넓은 잔디 광장에 높은 당간지주 세 개가 세워진 붐탕 자카르 종 안뜰. 7세기 송첸 감포가 세운 사원으로 부탄 불교의 역사적 심장부다.

◆국왕의 토지공유제

입헌군주국 군주로서 연설은 해도 기자회견은 하지 않던 부탄 국왕은 최근 해외 언론과 접촉면을 늘려가고 있다. GMC프로젝트의 철학자이자 설계자로서 사업 성공을 위해 홍보대사까지 자임한 것이다.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환경이 도시의 중심이 되는 GMC의 또 다른 특징은 소유구조다. 겔레푸 부지의 90% 이상은 국유지. 부탄 정부는 이 땅을 블록체인 기술로 ‘토큰’화해 전 국민이 나눠 소유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도시가 번성해 일자리가 생기고 부가가치가 오르면 그 상승분이 특정 계층이나 개발업자가 아니라 부탄 국민 전체에게 돌아가는 구조다.

토지에서 발생하는 가치는 공동체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사상은 19세기 미국 경제학자 헨리 조지가 ‘진보와 빈곤’에서 제시한 토지공유론을 떠올리게 한다. GMC는 불교적 전통에서 출발해 블록체인 기술이라는 21세기의 도구로 유사한 지향점에 도달한 셈이다.

다쇼 킨레이 돔 GMC 홍보실장 설명에 따르면 GMC 운영 방식은 일종의 경제특구로서 싱가포르와 아부다비를 따르는 방안이 검토된다. 자유로운 자본의 흐름을 허용하면서도 그 자본이 도시의 영혼을 흔들지 못하도록 하는 이중 장치다. 그는 “GMC는 한순간에 산에 오르는 방식이 아니다. 40년, 50년을 내다보는 긴 호흡의 프로젝트”라고 강조했다.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지는 겔레푸 마음도시(GMC) 완성 예상도.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지는 겔레푸 마음도시(GMC) 완성 예상도.

◆히말라야를 끌어들인 공항

GMC프로젝트 대부분은 아직 청사진 위에 놓여 있다. 겔레푸 시내 소규모 도심재생 사업과 국제공항 건설 정도가 현재 속도를 내고 있다. 역시 BIG그룹이 설계한 국제공항은 GMC의 최대 프로젝트로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대규모 목조 건축이다. 길이 20m인 거대한 집성목 기둥이 삼각형 구조를 만들며 최고 30m 높이로 솟아오른다. 조감도만 봐도 히말라야 산맥 능선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외관이 아름답고 웅장하다. 각 기둥에는 부탄 전통 공법으로 조각한 용 문양이 부탄의 과거·현재·미래를 상징하게 된다. 공항 건설 PM사 현장 책임자는 “단면이 가로세로 1m에 이르는 이 집성목 구조는 세계적으로도 시공 난도가 매우 높은 목구조”라며 “원자재는 전부 부탄에서 조달한다”고 설명했다.

GMC 국제공항 예상도.
GMC 국제공항 예상도.

규모는 인천공항 터미널의 약 10분의 1 수준이고 활주로는 2㎞ 단일 활주로인데 추후 확장을 염두에 둔 설계다. 고지대를 덮은 숲이 승객 도착장에서 공항을 지나 활주로까지 흐르고 열대 수목이 여행자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숲의 정원이 입국·보안·수하물의 주요 기능을 둘러싸는 개념이다. 국왕은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공항이 계속 바뀌는 것을 본다”며 “처음부터 기능을 넘어서는 설계를 원했다. 건축적으로 조화롭고 시간의 시험을 이겨낼 수 있는 공항을 원했다”고 설명했다.

신공항은 현재 활주로 건설이 한창인데 재원은 자력 조달한다고 한다.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속도를 내는 대신, 자신들의 돈으로 체제를 지키며 속도를 조절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국민총행복(GNH)을 국가 운영 철학으로 삼아온 나라다운 선택이다.

◆발전의 방향과 속도

국가 발전·개발의 속도는 개발도상국엔 중요한 문제다. 순례길 건설 현장에서 이를 묻자 국왕은 “공항 완공으로 마무리될 1단계는 매우 빠르게 속도를 낼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신중하게 진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겔레푸에서 납지, 붐탕 그리고 다시 파로로 이어진 9박10일간 답사에서 순례단 역시 지금 만난 부탄의 일상이 보다 소중하게 오래 보존되길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됐다. 부탄은 길도, 사람도, 소도, 뛰어노는 아이들도 모두 산기슭에 있었다. 산과 산 사이 계곡은 급류가 쏟아지거나 지형이 험해 사람이 살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부탄 사람들은 계곡을 피해 비탈에 집을 짓고, 그 비탈에 길을 내고, 같은 비탈에서 소를 먹인다. 산이 곧 마을이고 목초지이며 도로인 셈이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 삶을 일구고 있지만 부탄 사람들의 순수함과 친절은 이방인에겐 귀하게 여겨졌다. 영어를 초등학교부터 기본으로 배워 의사소통에 막힘이 없으면서도, 외지인을 만나는 눈빛에는 경계나 계산이 없다.

파로 계곡 해발 3120m 수직 절벽에 새 둥지처럼 매달린 탁상 사원. 8세기 구루 린포체가 암호랑이를 타고 날아와 수행했다는 전설의 성지로, 가파른 산길을 세 시간 걸어야 닿을 수 있다.
파로 계곡 해발 3120m 수직 절벽에 새 둥지처럼 매달린 탁상 사원. 8세기 구루 린포체가 암호랑이를 타고 날아와 수행했다는 전설의 성지로, 가파른 산길을 세 시간 걸어야 닿을 수 있다.

궁박한 형편에서도 손님이 찾아오면 꼭 다과를 대접해야 하고 가게 주인은 정직하다.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부탄이 왜 국민총행복을 국가 운영의 원칙으로 내세우는지, 그 답은 문서가 아니라 거리에 있었다. 이 풍경이 앞으로도 오래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겼다.

만국 공통의 소비문화도 부탄에선 보기 힘들다. 전국 어디에서도 스타벅스나 맥도날드 등을 만나지 못했다. 시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동차 대리점을 제외하면 해외 브랜드 자체가 드물었다. 호텔·식당 등 여행 인프라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이 자체가 불편보다는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왔다.

애초 부탄은 외국인 방문객 수를 정책적으로 제한하는 나라다. 입국 외국인에게 하루 100달러의 지속가능개발비(SDF)를 부과한다. 현대사에서 외세에 떠밀려 개방을 택해야 했던 여러 약소국의 뒤를 따르지 않고 정체성과 경제 주권을 지키고 있는 특별한 나라다. 열흘의 순례를 마치고 파로 공항으로 향하는 길, 국왕이 스스로 다짐하듯 순례길에서 강조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AI(인공지능)와 로봇공학이 세상을 아무리 바꾸어도, 뿌리가 되는 토대는 영성(靈性·Spirituality)입니다. 그것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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