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진 감독 “외계 생명체 디자인만 3년…
내수 바라보고 영화 만드는 시대 저물어
속편은 내 의지 아닌 관객 결정에 달려”
156분. 오늘날 극장가에서 선뜻 선택하기 어려운 러닝타임이다. 그 시간 동안 나홍진 감독은 관객을 외계 생명체와 맞서는 거대한 추격전 한가운데로 밀어 넣는다. ‘곡성’ 이후 10년 만의 신작 ‘호프’는 그의 첫 SF 크리처 영화이자 가장 거대한 프로젝트다. 외계 생명체 디자인에만 3년을 쏟았고, 시나리오 초고를 완성한 지 8년 만에 스크린에 걸렸다.
“이 러닝타임이 관객에게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7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만난 나 감독은 ‘호프’를 단순히 규모가 큰 영화가 아니라 달라진 영화 산업 속에서 자신이 내놓은 하나의 답이라고 설명했다.
‘호프’는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염두에 두고 출발한 프로젝트다. 나 감독은 “‘곡성’을 마친 뒤 영화를 포함한 시장 전체에 엄청난 변화가 오겠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말했다. ‘곡성’은 이십세기폭스가 한국 로컬 프로덕션을 설립해 제작한 작품. 폭스와 전속 계약 연장을 논의하며 미국을 오가던 시기 ‘호프’ 기획을 시작했다는 그는 “내수 시장만 바라보고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이제 저물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고 돌아봤다.
이러한 판단은 영화의 장르적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 “외국 기자들을 만나면 한국 영화는 여러 장르를 한 작품 안에서 섞어내는 특징이 있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장르 쪽으로 축을 옮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해외에서 수익을 내지 못하면 어려운 상황이 올 수 있다고 봤다. 장르의 수준을 높이는 데 집중한 결과가 ‘호프’다. 무모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오히려 더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시나리오 초고는 2018년 완성했다. 팬데믹이 끝나자마자 프리프로덕션에 돌입했지만, 개봉은 예상보다 늦어졌다. 나 감독은 “공정도 많았고 준비해야 할 것, 공부해야 할 것도 너무 많았다“고 돌아봤다.
외계 생명체 디자인에만 3년이 걸렸다. 영화에는 조르(알리시아 비칸데르), 마베이요(마이클 패스벤더), 바미기르(카메론 브리튼), 아이도보르(테일러 러셀)까지 할리우드 배우들이 모션 캡처와 페이셜 캡처로 구현한 외계 생명체가 등장한다.
크리처 디자인 과정에 대해 그는 “해외 스튜디오들과 작업했는데, 다들 할리우드에서 큰 작품을 하는 분들이어서 정말 많은 조언을 해주셨다”며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계속해서 변화를 겪었다. 나중에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섬에 사는 아티스트와도 작업했다”고 말했다.
디자인을 완성하는 것과 이를 영화 속에 구현하는 일은 또 다른 문제였다. 우여곡절 끝에 디자인을 완성해도 영화에 담기면 의도한 모습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 감독은 “대낮에 역동적으로 움직이면 모션 블러가 생기고, 그러면 디자인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컷이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더럽게 고생했다.(웃음) 말도 안 되는 시간이 걸렸고 매일 변화의 연속이었다. 한계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기 때문에 미련은 없다.”
약 700만명으로 추정되는 손익분기점 역시 개봉을 앞둔 ‘호프’를 둘러싼 관심사. 그러나 그는 “나는 시나리오를 영상화시키는 사람”이라며 ‘사업하시는 분들’의 영역과 선을 그었다. 그는 “사업하시는 분들에게 제작비를 설득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며 “그분들도 엄청나게 꼼꼼하게 고민하셨을 거고, 승산이 있고 그림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투자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곡성’에 이어 홍경표 촬영감독과 호흡을 맞춘 것도 ‘호프’의 미학을 완성한 힘이다. 나 감독도 홍 촬영감독도 완성도를 향한 집요함으로 유명한 인물. 나 감독은 루마니아 촬영 당시를 떠올리며 홍 촬영감독이 “‘홍진아, 이제 충분해. 많이 찍었어. 이제 그만하자’고 한 일화가 있다”며 웃었다.
156분의 러닝타임은 관객의 시점을 설계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는 “관객은 처음 60분 동안 범석(황정민)과 같은 입장에 서게 된다”며 “이후 성기(조인성)를 통해 외계 생명체를 마주할 때는 범석과 달리 오염됐을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정보를 가진 채 액션을 보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리고 엔딩에 도달했을 때 영화를 다시 어떻게 바라보게 될지를 생각하며 구조를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10년 만에 신작을 선보이는 그는 “나 역시 관객으로 영화를 볼 때 필름메이커가 누구냐에 따라 자세가 달라진다. 어떤 감독의 영화는 긴장하며 상영을 기다린다”며 “내 영화를 관객들이 그렇게 봐주시면 좋겠다는 정말 간절한 바람이 있기 때문에 많은 노력을 했다”고 했다.
그는 앞서 칸 영화제에서 ‘호프’ 이후 이야기에 대해 구상한 바가 있으며, 속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지금 시점에 중요한 건 내 의지가 아니라 관객들의 결정”이라며 “얼마나 많은 관객이 이 영화를 사랑해 주시고 찾아주시는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호프’는 15일 국내에서 개봉한 뒤 9월 9일 북미에서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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