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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당구장 카운터 보던 알바생이 어떻게 ‘최초의 챔피언’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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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원 기자 rewonv@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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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너머로 당구 배운 최혜미…순수 동호인 출신 최초 LPBA 우승

충남의 외진 곳에 자리한 작은 당구장. 손님이라곤 가끔 혼자 들르는 삼촌 손님 한 명이 전부였다. 칠 상대가 없어 “저랑 한 게임 쳐요” 하고 붙잡으면 돌아오는 말은 늘 같았다.

 

최혜미
최혜미

“너 당구 못 치잖아. 재미없어.”

 

자존심이 긁힌 아르바이트생은 그날부터 손님 없는 테이블에서 혼자 공을 굴렸다. 반년 뒤, 마침내 그 손님을 이겼다. 그는 웰컴스포츠 공식 유튜브 채널에 공개된 인터뷰에서 이 일화를 당구 인생의 출발점으로 꼽으며 스스로를 “승부욕으로 만들어진 선수”라고 했다.

 

오기로 붙든 큐가 그를 프로 무대 정상까지 데려갔다. 당구장 아르바이트를 하다 큐를 잡은 순수 동호인 출신 최초의 여자프로당구(LPBA) 우승자, 최혜미(32·웰컴피닉스)의 이야기다.

 

‘PBA 골든큐 어워즈 2026’에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참석한 최혜미. 순수 동호인 출신 최초의 LPBA 챔피언이다. 최혜미 SNS 캡처
‘PBA 골든큐 어워즈 2026’에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참석한 최혜미. 순수 동호인 출신 최초의 LPBA 챔피언이다. 최혜미 SNS 캡처

 

“당구장 알바가 꿀이래”…우연히 잡은 큐, 인생을 바꿨다

 

학창 시절에는 유도를 했다. 체육대회 씨름 경기에서 자기보다 덩치 큰 상대를 넘긴 것을 계기로 유도부에 스카우트돼 선수로 뛰기도 했다. 운동을 그만둔 뒤에는 화장품 영업 등 여러 일을 했다.

 

큐를 잡은 것도 우연이었다. 성인이 된 뒤 일자리를 찾던 중 “당구장 알바가 꿀”이라는 친구의 말을 들었다. 마침 집 앞에 당구장이 문을 열었고 그렇게 카운터에 앉았다.

 

요금을 받고 빈 테이블을 정리하는 게 일이었다. 당구는 손님들이 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보며 배운 게 전부였다.

 

당구에 본격적으로 빠진 건 TV 중계에서 프로당구 선수 김세연의 경기를 본 뒤였다.

 

‘여자도 당구를 치는구나.’

 

일이 끝나면 3쿠션을 칠 수 있는 구장으로 향했다. 레슨도, 코치도 없었다. 사람들과 끊임없이 게임을 하며 실전으로 공을 익혔다.

 

“그게 제 구력이 됐어요.”

 

LPBA 챔피언십 우승 후 소감을 밝히는 최혜미. PBA 제공
LPBA 챔피언십 우승 후 소감을 밝히는 최혜미. PBA 제공

 

7.3대 1 뚫고 프로로…34번 도전 끝에 터진 한 방

 

프로의 길이 열린 건 PBA 출범이었다. 연맹 소속이 아니던 그가 택한 문은 오픈 챌린지였다. 7.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데뷔 후 성적 부진으로 소속팀에서 방출되는 아픔도 겪었다. 무명의 시간이 이어졌지만 큐를 놓지 않았고, 이후 웰컴저축은행(현 웰컴피닉스)에 합류해 다시 기회를 잡았다.

 

프로 데뷔 4년 5개월. 34번째 투어에서 마침내 일을 냈다.

 

2023년 NH농협카드 LPBA 챔피언십. 시드도 없던 최혜미는 1차 예선부터 한 판씩 올라 결승에 섰다. 마지막 상대는 팀 동료 김예은이었다. 이미 두 차례 LPBA 정상에 오른 데다 최연소 우승 기록까지 세웠던 강자였다.

 

세트스코어 4-2.

 

마지막 세트를 가져오는 순간, 길었던 무명의 시간도 끝났다. 그렇게 순수 동호인 출신 최초의 LPBA 챔피언이 탄생했다.

 

우승을 확정한 최혜미의 세리머니는 의외로 소박했다. 두 팔을 들어 올리며 기뻐한 게 전부였다. 

 

“일반 당구장에서 이기면 ‘우와, 이겼다!’ 하잖아요. 그냥 그거였어요.”

 

생애 첫 LPBA 우승을 거둔 뒤 경기장을 찾은 아버지와 포즈를 취한 최혜미. 10년 가까이 연락이 끊겼던 부녀는 당구를 계기로 다시 인연을 이어갔다. 최혜미 SNS 캡처
생애 첫 LPBA 우승을 거둔 뒤 경기장을 찾은 아버지와 포즈를 취한 최혜미. 10년 가까이 연락이 끊겼던 부녀는 당구를 계기로 다시 인연을 이어갔다. 최혜미 SNS 캡처

 

“아빠, 박수만 쳐”…10년 만에 부녀 이어준 ‘당구’

 

우승으로 가는 길에는 특별한 응원군도 있었다. 10년 가까이 떨어져 지냈던 아버지였다.

 

두 사람을 다시 이어준 건 당구였다. 프로가 된 딸의 모습을 TV로 본 아버지가 먼저 연락해왔다.

 

특히 준결승전은 최혜미에게 잊지 못할 경기로 남았다. 상대 김민영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경기장을 채우자 아버지는 홀로 더 큰 목소리로 딸을 응원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외침에 자꾸 신경이 쓰였던 최혜미는 1세트를 내준 뒤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아빠, 말하지 말고 조용히 해. 박수만 쳐.”

 

그 뒤 아버지는 말없이 손뼉을 쳤다. 최혜미는 내리 세 세트를 따내며 생애 첫 LPBA 결승 진출을 확정했다. 그리고 그제야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아버지에게 짜증을 냈던 게 마음에 남았다. 자신을 위해 홀로 목청껏 응원하던 모습이 떠올라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서 왈칵 눈물이 났다”고 했다.

 

우승 뒤에는 “오늘 배드민턴 가방 같은 걸 들고 오셨던데, 우승 상금으로 우선 아빠 가방부터 사드려야 될 것 같다”며 웃었다.

 

웰컴피닉스 선수들과 함께한 최혜미. 최혜미 SNS 캡처
웰컴피닉스 선수들과 함께한 최혜미. 최혜미 SNS 캡처

 

어느덧 프로 8년 차. 최혜미는 현재 ‘스페인 전설’ 다니엘 산체스 등 세계적인 선수들과 웰컴피닉스에서 함께 뛰고 있다. 2025-2026시즌 팀리그에서는 산체스와 짝을 이룬 혼합복식에서 승리하며 팀에 힘을 보탰다.

 

개인 무대에서도 꾸준히 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2026-2027시즌 현재 LPBA 포인트랭킹 10위, 상금랭킹 12위(18일 기준)다.

 

유도를 그만두고 화장품을 팔고 당구장 카운터를 지키던 시절, 그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20대였다. 정해진 길도, 이끌어줄 스승도 없었다.

 

그런 그가 이제 프로 무대에서 또 하나의 목표를 향해 큐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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