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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⑫황희 정승과 조부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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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11-24 11:31:00 수정 : 2006-11-24 11: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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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재상 나온다” 麗末 고승 나옹이 점지해준 명당 지난 초여름 황희 정승의 할아버지(황균비) 묘를 찾았을 때는 궂은비와 함께 세찬 바람이 몰아쳤다. 간산 길에 비바람은 가장 큰 적이다. 나경을 제대로 펼칠 수가 없고 용맥, 좌향 등을 기록하기에도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다.
전북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 얼마나 좋은 명당 자리기에 이 묘를 쓰고 황희 같은 명재상을 배출했을까. 또 당시 풍수의 말이 얼마나 소중했기에 황 정승의 아버지(황군서)는 살던 땅 남원을 버리고 개성으로 이사까지 했는가. 묘를 쓴 후 반드시 고향을 떠나 객지에 나가 살아야 출세한다는 출아향지지(出亞鄕之地)는 과연 믿어야 하는 건지….
장수(長水) 황씨 문중에서는 시조 2세인 황균비 묘와 고려 말 고승이었던 나옹(懶翁) 선사 간에 얽힌 비화를 굳게 믿고 있다. 나옹은 조선 개국 초 국사였던 무학 대사의 스승으로 땅속 정기까지 꿰뚫어 보았다는 당대 신풍(神風)이었다.
나옹은 명당·길지가 많은 남원·순창 지역을 즐겨 찾았는데, 돈 많은 남원 윤 진사가 좋은 자리 잡아 달라며 300냥을 선폐백으로 건네주었다. 벼르던 중창불사를 일으킨 후 혈을 잡아 빚을 갚으려고 풍산리에 들어갔으나, 밖에서는 보이던 용맥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를 눈치 챈 윤 진사가 채근하며 망신까지 주었다.



◇전북 남원의 황희 정승 조부 묘. 직사(直射)로 뻗은 물길을 ‘출아향지지’로 보며 재물이 상하는 충수(衝水)로 여긴다. 이 묘를 쓰고 가족 모두 고향을 떠나 개성에 가 살았다.


이 사실을 안 황군서가 선뜻 300냥을 풀어 묵은 빚을 대신 갚아 주고 후한 대접까지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동안 가려졌던 자리가 훤히 보이는 것이었다. 나옹은 자리를 점지해 주며 “일국의 명재상이 나올 자리이긴 하나 찢어지게 가난한 혈처”라고 귀띔하며 “반드시 타향으로 나가야 발복받는 자리임을 명심하라”고 당부했다.
곧바로 황군서는 아버지 황균비 묘를 이 자리에 이장했고, 얼마 안 있어 부인한테 태기가 있자 개성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훌륭한 재상이면 그만이지 재산이 무슨 상관 있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이래서 황희 정승의 출생지는 개성이다.
‘출아향지지’는 다음의 용맥과 좌향이 해당된다. 다소 전문용어이긴 하지만 풍수학인들을 위해 소개한다. 그러나 막상 묘를 쓸 때에는 관직과 재물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혈처다.
▲진손맥하(辰巽脈下) 병오룡(丙午龍) 을입수(乙入首) 을좌임파(乙坐壬破) ▲술건맥하 임자룡 신입수 신좌간파 ▲축간맥하 갑묘룡 계입수 계좌경파 ▲미곤맥하 경유룡 정입수 정좌갑묘파 ▲병오룡 정미갑묘분지(丁未甲卯分枝) 손좌신파 ▲갑묘룡 을진임자분지 간좌정파 ▲임자룡 간인경유분지 건좌을파 ▲경유룡 신술병오분지 곤좌계축파.



◇묘 전면을 ㄷ자 모양으로 파 봉분과 연결시킨 황희 정승 묘. 조선 초기 왕실 대군 묘역에 나타나는 묘제로 왕릉에 버금가는 규모다(왼쪽), 후룡맥과 연결되는 황희 정승 묘의 후미가 예리하게 조영돼 있다. 묘좌 유향으로 해가 지는 정 서향이다.


그렇다면 황균비의 묘는 과연 어느 좌에 해당하는가. 40여명의 풍수학회 회원 모두가 640여년 전 나옹 선사가 걸었던 길로 산비탈을 오르니 거기에 묘가 있다. 이 터를 두고 감히 누가 좋으니 그르니 할 것인가.
놀랍게도 진손으로 내려온 병오룡에 을입수 을좌신향 임파(물나가는 방향)다. 7기의 묘가 아래위로 나란히 용사돼 있는데, 용맥 그 자체가 군데군데 혈을 맺고 있다. 소나무 사이로 내려온 갈 지(之)자 맥이 매우 급하다. 당판을 감싸안은 좌우 협곡이 좁아 답답한 듯하나 혈처를 꼭 껴안고 있다. 이곳이 바로 명홍조풍형(鳴鴻遭風形), 기러기가 바람을 만나 울면서 멀리 날아간다는 유명한 혈처다.
앞을 보니 안산이 멀고 물이 직사(直射)로 빠져나간다. 자리는 명당이지만 재물과 여자가 상한다는 충수(衝水)다. 저 물길 때문에 황희 정승이 한평생 청백리로 가난하게 살아야 했는가를 생각하니 갑자기 ‘땅의 이치’라는 풍수가 두려워진다.
청백리(淸白吏). 공직자의 표상으로 누구나 듣고 싶은 칭호이며, 국민의 신망과 존경을 한몸에 받는 자리다. 오늘날에도 청렴하게 산 공무원에게 주어지는 ‘청백리상’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정하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 가난하다는 얘기와도 통한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황희만한 청백리가 또 있겠는가. 그래서 ‘황 정승’ 하면 청백리부터 떠올린다.
경기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 1번지. 지난 17일 조락(凋落)의 초겨울에 황희 정승 묘를 다시 찾았다. 자유로를 따라 탄현면에 들어서서 ‘황 정승 묘’를 물으면 “청백리 길만 물어 가세요”라고 대답한다. 인근 주민 누구나가 청백리 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정표까지 만들어 놓았다. 죽어서도 후손들을 빛나게 해주는 조상이다.
경기도기념물 제34호. 그의 혈처는 갑경 입수룡에 묘좌 유향으로 정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멀리서 결혈(結穴)하며 내려오는 용맥이 번신을 거듭하다가 혈처에 와서는 우뚝 멈춰 섰다. 당판 앞의 우백호가 좌청룡을 넉넉하게 감싸안았다. 동행한 풍수학인들도 좋은 자리에 들어서면 상서로운 기운부터 감돈다며 탄복한다. 우백호가 저토록 듬직하니 비록 황 정승은 가난하게 살았어도 후손들은 큰 복을 받았을 것이라며 덕담을 아끼지 않는다.



◇황희 정승 동상(왼쪽), 청백리길 이정표


황희(黃喜)는 고려 공민왕 12년(1363) 개성 가조리에서 태어나 조선 문종 2년(1452)까지 90세를 살았다. 고려가 망하자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간 후 세상과 등졌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조정의 끈질긴 부름과 동료들의 권유로 출사하여 후세에 길이 남는 명재상이 되었다.
황희는 한평생 말과 웃음이 적었고, 사람들이 그의 기뻐함과 노여워하는 표정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일에 임하여서는 대체적인 것만을 힘쓰고 자질구레한 것은 따지지 않아 문하의 많은 관료들이 창조적 소신으로 국사에 임할 수 있었다. 태종은 비록 공신은 아니지만 공신 대우를 했으며,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해 매일 그를 독대했다고 한다.
그의 묘는 특이한 구조로 조영돼 있다. 3단으로 넓게 조성된 묘역에 전면을 ㄷ자 모양으로 파서 봉분과 연결시킨 구조다. 조선 초기 왕실 대군 묘역 등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묘제로 봉분 규모도 왕릉에 버금가며 후룡맥과 연결되는 후미(後尾)가 매우 예리하다. 비록 본인은 빈곤하게 살았지만 당시 온 백성들로부터 추앙받는 재상이었으니 장례 절차 모두가 얼마나 정중했을까 싶다. 근처에는 큰 벼슬을 하며 문중을 빛낸 후손들이 가깝고 먼 산에 묻혀 있다.
경기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산 122번지에는 ‘황희 선생 유적지’가 있어 경기도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돼 있다. 황희의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村), 시호는 익성공(翼成公)이다. 여기서 자, 관명, 호 등을 구분해 달라는 독자분의 요청이 있어 설명하고자 한다.
▲초명은 아명(兒名)이라고도 하며 출생하고 나서 수명 장수의 기원을 담아 짓는 이름이다. 문중의 족보를 면밀히 살피다 보면 초명이라 하여 억년(億年), 수만(壽萬), 연수(延壽) 등이 자주 등장한다. 오래 살기를 염원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자(字)는 관례(冠禮·최근의 성년식)를 올린 후 좋은 뜻을 담아 지어 부르는 이름으로 대개 스승이나 집안 어른이 지어 주었다. ▲관명(官名)은 족보에 올리는 이름으로 황희의 ‘희’자가 해당된다. ▲호(號)는 성장 후 짓는 별칭으로 스승 혹은 친구가 지어 주기도 했다. 자기가 지으면 자호요 남이 지어 주면 타호였으며, 호가 없으면 자를 부르기도 했다. ▲택호(宅號)는 처갓집 동네를 부르는 별칭으로 장가간 후 얻는 것이다.
방촌 황희는 성군 세종대왕이 있어 명재상이었다. 방촌은 태종이 세자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책봉하려 하자 적장자(嫡長子) 승계의 원칙을 내세워 목숨 걸고 반대했다. 충녕대군이 바로 후일의 세종이다. 그러나 황희의 인물됨을 알고 유배 간 방촌을 불러들여 요직에 앉히고 나라 위해 큰일을 하게 한 임금이 세종대왕이다. 영의정 등 3정승 6판서를 두루 섭렵하며 조선 초 국기를 튼튼하게 다져 놓았다.
임진강 하구를 바라보는 절경에 위치한 유적지 안에 반구정(伴鷗亭)이 있다. 87세에 벼슬길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삼아 만년을 유유자적한 정자다. 평생을 청백리로 살았지만, 몇 번의 유배를 다녀오고 서인으로까지 강등되는 등 편안치만은 않았다. 영정과 동상이 여기 있어 그를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황희는 세종 묘정(廟廷)에 배향되며 불천지위(不遷之位:나라에서 제사를 모시는 신위)로 종묘 안의 공신당에 모셔져 있다. 공신당(功臣堂)에는 업적이 뛰어난 신하 83위가 봉안되어 있다.
황희는 처음 최씨 부인과 혼인했으나 사별하자 양씨 부인과 재혼해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영의정, 한성부윤 등을 지낸 명관들이다. 선조 23년 일본 내정을 살핀 후 내침 가능성을 보고한 황윤길과 한일합병 후 분함을 참지 못해 음독 순절한,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 역시 장수 황씨며, 최근 인물로는 국무총리를 지낸 황인성씨가 있다.
황 정승은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검은 소와 누렁 소로 쟁기질 하는 농부를 만났다. “어느 소가 일을 잘하느냐”고 물으니 하던 일을 멈추고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짐승도 저 안 좋다는 말은 알아듣습니다.” 그 후 황희는 크게 깨닫고 평생 겸손하고 후덕한 도량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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