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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 표충사 한 번 핀 꽃은 몸을 웅크릴 수는 있어도 다시 줄기 속으로 몸을 감추지는 못한다. 한껏 웅크렸다가 날 풀리면 잎 벌리는 수밖에. 그 생리 또한 사람과 똑 닮았다. 밀양 표충사 3층석탑 앞에서 겨우 잎을 피워낸 매화가 꼭 그 타령이다. 봄인가 싶어 잎을 열었는데, 잎사귀 벌린 꽃이 벌벌 떠는 모습에 다른 꽃봉오리들은 조용히 입 닫고 있다.
버스를 대절해 절구경, 꽃구경 나왔던 사람들이 주차장 양지녘에서 도시락을 까먹는 중인데 댓잎 수런거리는 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휘어지긴 해도 꺾이지는 않는다, 절집 뒤편에 휘장처럼 펼쳐진 대나무밭이 통째로 활처럼 휘었다 펴진다. 대숲이 통째로 흔들리는 모습에 마음을 앗기려고 발걸음이 동했던 것인가.
절문 밖으로 나서 구천리 마을을 기웃거린다. 시장기가 돌면 공양 때에 맞춰 절집에 드는 게 가장 확실한 해법이지만 공양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게 단점이다. 마을 어귀를 기웃거리면 방법이 있는가. 있다. 새참 시간은 절집 공양 시간과는 좀 어긋나는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구천리 초입 저쪽 통나무를 쌓아놓은 곳에 마을 사람 서넛이 철퍼덕 앉아 있는 게 보인다. 시골 사람들이 앉아 있다는 것은 한잔 마시는 중, 혹은 뭘 먹고 있다는 암시다.
◇꽃샘추위에 화들짝 놀라 잔뜩 움츠린 매화 뒤편으로 삼층석탑이 우아하게 서 있다. 표충사 3층석탑은 보물 467호로 지정돼 있다.

“쯔쯧, 일은 안 하시고 아침나절부터 한잔들 하시네요.”
“일을 안 하다이, 새벽 참에 나와꾸마. 지금 새참 아인겨. 근데 왜 간섭인교?”
“아, 그러셨구나. 그러고 보니 새참 때네요. 그런데 새참을 떡으로 때우면 어쩝니까. 며느리한테 밥해 가지고 나오라 하시지.”
“빌 걱정 다하시누마.”
60줄은 돼 보이는 아주머니가 대답 대신 소주잔부터 건네온다. 하늘색 비닐 컵에 한 잔 가득, 거의 치사량에 가깝다.
“요 앞에 차 세워놓고 왔는데 음주운전 걸리면 책임지실 거죠?”
“대낮인디 음주운전 단속 할랑가.”
절반쯤 흘려넣고 술잔 내려놓는데 콩설기 떡이 입 안으로 들어온다. 지나던 객과 대거리를 하는 아내를 남편 박종옥(68)씨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웃는다.
얘기 듣고 보니 이 양반들 참나무 원목에 표고버섯 종균을 심는 중이란다. 박씨는 드릴로 참나무에 구멍을 뚫고 아내 정순화(60)씨는 윗동서 이양수(67)씨, 아랫동서 황복숙(55)씨와 종균을 심는다. 드릴이 돌아갈 때마다 참나무 파편이 잔뜩 튀어오르는데, 박종옥씨가 갑자기 허리를 펴고 언성을 높인다.
“몸살 났다믄서 뭐하러 나와?”
뭐하러 나오느냐고 하지만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다. 사위란다.
“많이 좋아졌는디요.”
이로써 딸만 빼고 일가족 모두가 일터로 나온 셈이다. 새참은 이미 끝났고, 부지런히 일손 놀리는 박씨 일가의 식구들 등으로 봄볕이 쏟아진다. 표고 종균 배양은 3월이 가기 전에 해야 좋은 법, 수북이 쌓인 참나무에 종균을 다 심으려면 허리 펼 짬도 없다.
“돈 많이 버시겠네요. 1년에 얼마나 버시나?”
“돈? 그건 알아서 뭐하시게. 이래 해도 3년 지나야 현금 되는디.”
“에이, 3년 지나도 현금으로 돌아오면 됐지 뭘 그래요. 어쨌든 기념사진이나 찍어드릴게.”

◇표충사 앞마을 구천리 사람들은 봄날을 즐길 겨를도 없이 참나무에 표고 종균을 배양하느라 여념이 없다. 겨울 꽃눈 같은 종균들이 벚꽃 못지않게 아름답다.


“기념사진? 나중에 잡아가려고?”
“잡아가긴요?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나올 텐데, 인기 스타가 된다구요.”
“어이 동서들, 우리가 신문에 나온다는디….”
박종옥씨 가족이 포즈를 취한다. 역시 술 한잔 나누면 대화에 갈등이 없는 법, 아침나절에 소주 한 잔 마신 취기가 올라와 카메라를 쥔 손이 흔들린다. 심호흡을 해가며 셔터를 누르는데 사위가 나선다.
“사진 이메일로 좀 보내주세요.”
“보내주고 말구요” 하면서 사위의 얼굴을 보니 도심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꽃미남에 가깝다.
봄날, 표고버섯 농사에 매달린 사람들과 술 한잔 나누며 보내는 시간은 이렇듯 달콤하다. 내가 사는 곳 찾은 사람이니 떡이며 술이며 나눠 먹이고 보내야 한다는 인정이 살아 있는 것이다. 눈 돌려 보면 매화가 피고, 사철나무에도 꽃눈이 올라와 있으니 그 역시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박종옥씨 사위의 이메일 주소를 받아들고 다시 표충사로 들어선다. 절 마당에 들어서니 약수터에는 색색의 플라스틱 표주박이 늘어서 있고, 대웅전 앞의 3층석탑은 봄날 해바라기를 즐기고 있다. 신라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오면서 민초들이 탑돌이를 할 때마다 묵묵히 그들의 기원을 접수하고, 시대의 고통을 함께 나눴는데도 크게 훼손되지 않은 게 신기하다.
속인들은 절집 마당을 한 바퀴 휘돌아 멋있네, 멋있네 해가며 절집 앞의 식당가를 찾아 나서지만 그래도 효봉 스님 부도탑만은 봐야 하는 법, 절집 왼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표고버섯 농사에 나선 박종옥(중앙)씨와 아내 정순화(오른쪽)씨, 박씨의 형수 이양수씨가 새참을 먹고 난 후 인기 스타가 되기 위해 포즈를 취했다. 다들 봄볕에 취한 모습이다.


◇표충사 대웅전 뒤편의 대나무숲이 봄바람을 못 이겨 통째로 몸을 좌우로 꺾는다. 대나무 숲은, 휘어질지언정 꺾이지 않는 탄력과 유연함의 상징이다.


효봉 스님이 누구인가.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법조계에 투신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판사로 활동했던 사람이 효봉이다. 그런 효봉이 속세에서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자리를 버리고 방랑길에 나섰다가 스님이 된 사연은 무엇인가. 1923년, 그는 자의와는 관계 없이 한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인 후 판사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인간이 인간을 벌하는 것을 떠나 목숨을 앗을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38세 때의 늦은 출가였지만, 그는 한 번 앉으면 일어나지 않고 정진한다 해서 절구통 수좌라는 별칭을 얻은 스님이다. 그는 66년 입적하기 전까지 오직 ‘무(無)라 무라’를 반복하며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의 화두를 놓지 않았다. 구자무불성, 개는 불성이 없다는 뜻이거니와 구자무불성,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어찌 개는 불성이 없다고 하는가를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화두이기 때문이다. 화두에 무슨 답이 있는가. 화두에는 일방통행이 없다.
길을 바꿔 표충사에서 10여 분 거리인 얼음골을 찾아 나선다. 한여름에는 얼음이 얼고, 겨울에는 오히려 따뜻한 물이 흘러내린다니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못할 일. 그러나 겨울 가뭄 탓에 얼음바위에는 얼음도 없고, 따뜻한 물도 없다. 천황사 뒤편으로 돌아 가마불협곡으로 들어선다. 거기 하나의 풍경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폭포가 얼어붙어 봄의 겨울을 연출하고, 한편으로는 수직낙하하는 물줄기가 봄다운 봄을 연출한다. 無인가 싶으면 무가 아니고, 무가 아닌가 싶으면 無인 세계이니 무라, 무라 했던 효봉스님의 ‘할(喝)’이 떠오른다. 갑자기 밀양이 궁금해 달려온 길, 와서 보니 봄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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