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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36>교토시 히라노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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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05-02 16:58:00 수정 : 2007-05-02 16: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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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 主神으로 모셔
日王들 참배… 기념식수도
일본 왕실이 백제 왕족 계열이라는 것을 고증하는 터전이 교토 시내에 있는 히라노신사(平野神社)다.(京都市北區平野宮本町 1번지) 오사카(大阪) 동북쪽에 있는 교토는 백제계의 간무왕(桓武, 781∼806 재위)이 794년 개창한 고대 왕도다. 이곳 히라노신사야말로 역대 일본왕이 고스란히 한국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결론부터 밝히자면, 히라노신사의 신전에 모셔진 제신(祭神)들의 주신은 백제 제26대 성왕(523∼554 재위)이며 다른 신들도 모두 백제왕과 왕족이다.


일본왕들은 히라노신사에서 참배했다. 이 성왕 사당에 절을 올린 마지막 일왕은 히로히토 일왕(昭和, 1926∼1989 재위)으로 지금의 아키히토 일왕(1989년 즉위) 아버지다. 히로히토 일왕은 1940년 기념식수도 했다. 히라노신사의 최고 사제인 오사키 야스히로(尾崎保博) 신관은 “쇼와 천황께서 기원 2600년(1940)을 기념해서 몸소 소나무를 심었다”고 98년 4월 필자에게 자랑했다. 당시 소나무 앞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나무판도 세워져 있었다.
‘紀元二千六百年(昭和 15년) 天皇階下御手植松’
그러나 올해 1월에 가보니 그 팻말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옛날 히라노신사에서 간행한 ‘히라노신사유서략기’(平野神社由緖略記)를 보면 일본왕들이 제사를 지낸 기록도 보인다.
“덴겐 4년(天元, 981년) 3월 엔유 천황(圓融天皇, 969∼984 재위)이 이곳에 직접 행행(行幸)한 이후로 계속해서 역대의 천황들이 행행하였다. 또한 태황태후와 황태후, 황후의 행계(行啓, 출입)도 그 예가 적지 않았다. 가잔 천황(花山天皇, 984∼986 재위) 당대인 간나 원년(寬和元年, 985)에 천황이 몸소 벚나무 식수를 하면서 벚꽃 명소로 이름이 높아져 벚꽃축제인 앵제(櫻祭)와 신행제(新幸祭)가 해마다 4월10일 거행된다. 추수를 감사드리는 신상제(新嘗祭)는 11월23일 거행된다.”
10세기 초 일본 고대 왕실 편찬 문서인 ‘신명장’(神名帳)에도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히라노 제신(平野祭神)은 4좌(四座)이며, 이마키신(今木神) 구도신(久度神) 후루아키신(古開神) 아이도노(相殿·2명 이상의 신주를 제신으로 합사하여 함께 모신 신전)의 히메신(比賣神·공주님 신주)이노라.”
◇히라노신사의 백제 화신립황태후(제50대 간무왕 생모인 화신립 공주님 신주) 히메신을 모신 신전.

제4신전인 아이도노의 히메신은 왜왕실의 백제인 조신 화을계공(和乙繼公)의 장녀였으며, 백제 제25대 무령왕(504∼523 재위)의 직계 후손이다.(‘속일본기’ 797년 일본 왕실 편찬) 이 사실은 아키히토 일왕이 공언했다.(2001년 12월23일) 고대 일본 왕실 의식 절차 등을 정한 ‘신명장’에 앞선 9세기의 ‘조간의식’(貞觀儀式)에도 히라노신사의 제사 의례에 관한 사항이 다음과 같이 규정돼 있다.
“이마키신으로부터 제사가 시작된다. 다음에 구도신, 다음에 후루아키신, 그 다음에 아이도노의 히메신이다.”(平野祭儀 ‘貞觀儀式’ 871년 성립)
이 ‘조간의식’은 백제 계열의 세이와왕(淸和, 858∼871)의 칙명에 의해 조정에서 작성한 문서다. 세이와왕은 히라노신사를 처음 세운 간무왕의 고손자(高孫子)이다. 여기서 좀 더 자세하게 최고의 제신인 이마키신, 즉 백제 성왕(일본 역사에서는 주로 聖明王으로 호칭)부터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히라노신사가 성왕 사당이란 사실을 밝힌 일본 저명 학자들의 오랜 문헌이 적지 않다. 에도시대(江戶, 1607∼1867) 후기의 국학자 한노부토모(半信友, 1775∼1846)는 자신의 저서 ‘번신고’(蕃神考)에서 “이마키신은 백제 성명왕”이라고 밝혀 유명해졌다. 번신이란 고대 한국으로부터 일본으로 건너간 신 등을 가리키는 표현이며 그리 달가운 용어는 아니다. 동양사학 권위자로 평가되는 나이토 고난(內藤湖南, 1866∼1934) 박사도 이렇게 밝혔다.
“이마키신은 외국으로부터 건너온 신이다. 구도신은 성명왕의 선조인 구태왕(仇台王)이다. 후루아키신은 후루(古)와 아키(開)로서 두 왕으로 나뉘어, 후루는 비류왕(沸流王), 아키(開)는 초고왕(肖古王)이다.”(內藤湖南 ‘近畿地方に於ける神社’ 1930) 5명의 백제신 신주를 모셨다는 연구인 셈이다.
나이토 고난 박사가 표현한 이마키신은 두말할 나위 없이 백제 성왕을 가리킨다. 그러면서 그는 구도신이 구태왕(仇台王) 즉,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 기원전 18∼서기 27)이라고 지목한다. 초고왕(肖古王, 166∼213)은 백제 제5대왕이며 비류왕(沸流王)은 백제 시조 온조왕의 친형이다. 비류는 온조가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할 때 지금의 인천인 미추홀로 갔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보이나 그후 그가 왜나라로 건너갔다는 것은 비류가 히라노신사의 제신이 된 것과 연관된다고 본다. 현대의 사학자인 다카야나기 미쓰토시(高柳光壽) 교수 등이 편찬한 일본역사 사전에도 그런 사실이 나타난다.
◇히라노신사의 유래판(교토시). “이마키신(今木神)은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다”라고 밝히는 내용이 없다. 고대사학자가 아니고서는 일본인들 중에서도 이마키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드물다.

“히라노신사 제신은 백제계의 이마키·구도·후루아키·히메의 4신이다. 794년 이마키신을 다른 3신과 함께 간무 천황이 나라로부터 지금의 터전으로 옮겨왔으며 뒷날 헤이시(平氏)의 씨신(氏神, 가문의 신)이 되었다. 연례 제사를 ‘히라노마쓰리’(平野祭)라고 부르며, 신전 건물은 ‘히라노쓰쿠리’(平野造り) 건축 양식이다.”(高柳光壽·竹內理三編 ‘日本史辭典’ 角川書店, 1976)
이 사전에서 주목되는 것은 간무왕의 직계 왕손인 무장(武將) 헤이시가문도 백제왕들을 조상신인 씨신으로 모시고 히라노신사에서 제사드렸다는 사실이다. 즉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 1118∼1181)로부터 시작되는 헤이시무가(平氏武家)도 백제인 왕족 가문임이 드러난다.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간무왕의 직계 후손으로서 국가 권력을 거머쥔 최고위직 태정대신이며 무장으로서 ‘헤이시정권’을 이룬 큰 인물이다. 현대의 사학자인 나카가와 도모요시(中川友義) 교수 역시 자신의 연구론(‘渡來した神神’ 1973)에서 이런 사실들을 자세히 썼다.
◇히라노신사 내부를 지키는 ‘고구려개’(고마이누). 일본의 신사마다 중요한 사당은 고구려견의 고대 조각 작품들이 배치돼 있다.

히라노신사야말로 한국인에게 감개무량한 터전이 아닐 수 없다. 안타까운 사실은 한국에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일본인들조차 역사적 배경을 거의 모르고 있다. 유서 깊은 명소인 히라노신사 항목이 빠져 있는 교토 관광 안내 책자도 많다. 교토 역사를 다룬 명저로 알려진 책 중에 ‘교토기행―역사와 명작’(京都紀行歷史と名作, 主婦の友社 발행, 1988)이 있다. 교토의 중요한 신사와 사찰을 상세히 소개한 책이다. 그러나 히라노신사는 들어 있지 않다. 책의 감수자는 다키 슈조(高城修三·60)라는 저명한 작가로서 ‘아쿠타카와 문학상’(茶川文學賞)까지 받은 사람이다. 그는 ‘일본 전통문화와 역사 속에서의 교토 위치’라는 제목까지 달린 긴 해설에선 이처럼 지적했다.
“일본의 전통문화와 역사를 마주 대하려면, 교토를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다.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 1880∼1938)를 비롯해 외국인 작가, 철학자, 미술가 등 많은 분야의 사람들이 슬며시 교토를 찾아온 뒤에, 수필이나 기행문을 써서 일본의 재발견을 시도하고 있다.”
이런 시각을 가진 작가가 어째서 일본 신전 건축미로도 유명한 히라노신사가 빠진 교토 안내 책자를 묵인했을까. 히라노신사의 건축양식은 ‘히라노쓰쿠리’(平野造り) 또는 ‘히요쿠카스가쓰쿠리’(比翼春日造り)로 높이 평가돼 일본 신전 건물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이 신전은 794년 처음 세워졌고, 그 후 지금처럼 재건된 것은 1598년과 1604년의 일이다. 이같이 빼어난 신전이 있다는 사실을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도 알지 못한 채 교토를 지나쳐 버린 셈이다. 그는 독일의 대표적 표현주의 건축가로서 일본 고대 건축문화를 높이 평가한 ‘일본미의 재발견’의 저자이나 ‘히라노신사’는 다루지 못했다.
일본의 저명한 스기 시노부(杉信夫) 역사평론가는 일찍이 다음처럼 일인 저술가들의 처사를 비판했다.
“고대 유적, 유물과 관련해 의식적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설명을 탈락시키거나 부정확하게 설명하는 등 고대 조선 문화와의 관련을 배제시키거나 무시하는 역사 서적과 안내 책자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문화와 조선 문화가 똑같은 조상에 의해 이루어진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우리 일본인들이 솔직히 받아들여서, 일본 문화의 실체가 무엇이었던가를 알아보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學界展望’ 1973년 8월) (다음주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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