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한 선교사가 찍은 기근 희생자들. 선교사는 “이 단계에 이른 사람들은 거의 회복하지 못횄다”고 설명을 달았다. |
1876년부터 1899년 사이에 세계 역사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단지 세기말이라는 것일 뿐,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특별히 기록하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무시 혹은 증발시켰다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정병선 옮김/이후/2만3000원 |
역사학계의 명석한 이단적 학자 마이크 데이비스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바로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이 시기를 주목했다. 그는 여기서 19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전 세계를 유린한 ‘엘니뇨’라는 자연현상과 이를 자국의 야욕 채우기에 이용한 ‘제국주의’라는 리바이어던(괴물)을 찾아냈다. 바로 ‘대기근’과 ‘착취’다. 엘니뇨와 제국주의가 손을 잡고 빚은 참극이다.
지은이가 수집한 방대한 자료에 의하면, 1876년부터 1902년에 걸쳐 엘니뇨가 발생했을 당시 세 차례의 가뭄과 기근으로 최소 3000만명에서 5000만명의 식민지 빈민이 사망했다. 참혹한 가뭄과 기근 사태를 목격한 사람들은 거대한 괴물이 아프리카 나일 강에서 중국 황해에 이르는 지역을 유린하며 지나간 듯하다고 썼다. 당시는 자유경쟁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라 일컫는 때였다. 영국 등 식민 모국의 관점에서 볼 때 제국의 영광을 밝혀 주던 19세기의 마지막 불꽃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관점에서 보면 거대한 화장용 장작더미가 내뿜는 소름끼치는 불빛에 지나지 않았다.
대체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의 꽃이 만개한 상황에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지은이가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단지 수천만명이 끔찍하게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19세기 경제사에 대한 전통적 지식과 상당히 모순되는 방식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이 시대의 가뭄 기근을 흔히 자연재해로 치부해 버리는 기존의 역사 서술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흉작도 원인의 일부지만 철도로 기근 지역에 원조물자를 보내는 게 가능해진 뒤였다. 문제는 엄청나게 치솟아 버린 가격 때문에 곡물을 살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전에는 소규모 가게들이 흉작에 대처하는 방편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가게들이 사라지거나 대규모 시장으로 흡수되었다. 독점 자본가들이 사실상 상황을 장악했다. 곡물의 자유로운 유통은 그들 손아귀에 있었다. 자유롭고 공정한 교환 체계 아래 인도인 수백만명이 죽었다.”
아프리카 인도 중국 브라질…. 식민지 나락에 떨어진 나라들은 인류사 최악의 흉작과 물 부족 사태로 처참한 식량난을 겪으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식량을 내줘야 했다. 식민지 주민들은 부두에 산적한 수출용 곡물 창고 옆에서 굶어 죽어가야 했다. 대형 선박과 기차는 계속해서 쌀을 실어갔다. 1897년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행사엔 최소 1억파운드를 지출한 영국 관리들은 인도의 기근 구호엔 단 한푼도 예산을 책정하지 않았다.
일본 수중에 넘어간 당시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에서 절호의 기회를 붙잡은 열강은 일본이었다. 북중국의 가뭄이 유사한 양상 속에서 조선의 곡창이었던 전라도로 뻗어나갔다. 이 은둔의 왕국을 착취하려던 일본에 가뭄은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일본은 열도의 쌀을 가져가라고 전했다. 조선은 쌀을 되갚을 능력이 없다고 했지만 일본은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확언했다. 그러나 10년이 채 안 돼 조선은 가뭄 속에서도 일본에 쌀을 수출해야 했다. 결국 전라도의 굶주린 농민들은 동학농민운동으로 이 사태에 혁명적 불만을 토로한다.”
지은이는 동학농민운동도 파헤쳤다. 그는 조선왕조의 봉건적 질서가 무너지고 실학의 대두로 평민의식이 성장하면서 발생했다고 배운 전통적인 설명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분석인지 일깨워준다. 그의 눈엔 동학혁명 역시 전 세계 농업인구가 신제국주의 질서에 순순히 편입되기를 거부하고자 벌였던 전쟁의 일환이다. 세포이항쟁, 의화단운동, 브라질의 카누두스 전쟁처럼 생존 및 환경 위기에서 생존권을 놓고 벌이는 기근 저항운동인 것이다.
지은이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이들 국가는 식민지 나락에 떨어지기 전엔 가뭄과 기근을 방어할 수 있는 고유의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세계 경제에 강제 통합되면서 이게 무너졌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자유시장경제로 전환된 생존의 뒤틀린 논리, 식민지 세입 양도의 결과, 금본위제를 제정하면서 일어난 충격, 재래식 관개시설의 파괴 등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경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농민이 떠맡아야 했던 기여는 필수적이었다.
정병선은 번역자의 말을 통해 “‘자연재해’는 전혀 자연적이지 않다”고 했다. 즉, 19세기 판 인위적 홀로코스트라는 것. 수백만, 수천만명이 죽어도 속수무책인 엘니뇨에 의한 가뭄·기근·굶주림과 제국주의에 의한 착취와 그로 인한 사망,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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