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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가족법 대가 김주수 前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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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2-05 09:37:18 수정 : 2009-02-05 09:3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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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법 바로잡기 50년…“호주제 폐지 등 보람 ”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1955년 어느 날, 젊은 법학도 김주수의 손에 ‘대한민국 민법 초안’이 쥐어졌다. 그의 눈길은 친족의 권리·의무와 상속 절차를 규정한 가족법 부분에 멎었다. ‘이게 민주주의 국가의 가족법인가? 일제가 조선 통치를 위해 들여온 식민지 시절의 호주제 그대로가 아닌가?’ 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김주수 전 교수는 “호주제 때문에 남아선호 사상이 더욱 강해지고, 그로 인해 인구 증가가 멈추지 않는다는 인식이 퍼져 나갔다” 고 말했다.

“우리는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던 겁니다. 헌법이 남녀평등을 규정하고 있는데 당연히 거기에 맞는 가족제도로 나아가야죠. 더욱이 우리 고유의 전통도 아니고 일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돌아가선 안 되죠. 이것을 내 평생 연구 테마로 삼아야겠다, 가족법이 제 모습을 찾도록 해야겠다,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서울대 법대 시절 은사의 영향도 컸다. 조용한 성격에 성적이 뛰어난 그를 눈여겨본 정광현 교수가 일찌감치 ‘후계자’로 낙점했다. 민법 담당이던 정 교수는 당시 국내에서 유일한 가족법학자였다.

“선생님이 ‘졸업하면 대학원에 진학해 교수가 됐으면 좋겠다’고 하셨죠. 졸업 무렵에 다시 뵈었는데 ‘내 밑에서 공부하라’고 하시더군요. 전쟁으로 서울대가 부산에 피란해 있던 시절입니다.”

대학원을 마친 뒤 경희대 강단에 선 그는 본격적으로 가족법 바로잡기에 나섰다. 57년 발표한 논문 제목은 ‘현행 가족제도의 존속가치―민법 초안의 호주제도를 비판한다’였다. 하지만 당시 정치인과 학자들은 호주제를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58년 국회는 민법 초안을 원안 거의 그대로 통과시켰다.

5·16군사정변 후 들어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호적 개혁에 관심을 가졌다. 62년 꾸려진 ‘호적제도연구위원회’에는 사광욱 대법관, 훗날 대법원장이 된 이영섭 이화여대 교수, 김증한 서울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소장학자 김주수도 위원이 됐다. 이때 그는 ‘민법상의 호주제도가 폐지돼야 할 이유’라는 보고서를 썼다. 하지만 그를 뺀 모든 위원들이 호주제 폐지에 반대해 힘을 못 썼다.

난공불락이던 호주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군사정권이 산아제한 정책을 추진하면서다. 호주제 때문에 남아선호 사상이 더욱 강해지고, 그로 인해 인구 증가가 멈추지 않는다는 인식이 퍼져나갔다.

“하루는 대한가족계획협회에서 나를 불러 강연회를 요청했어요. 강연이 끝난 뒤 협회 간부들에게 ‘이런 것 100번 해도 소용없다. 가족법이 철저히 남자 중심인데 그걸 두고 딸 아들 구별 말자고 하면 되느냐. 법을 고쳐야 사람들 의식도 바뀐다’고 지적했죠. 그래서 협회가 YWCA와 손잡고 가족법 개정운동에 나선 겁니다. 이태영 변호사를 비롯해 여성계도 적극 참여했죠.”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77년 민법이 일부 개정됐다. 호주제는 그대로 살아남은 대신 아버지만 행사할 수 있었던 친권을 부모가 공동으로 행사할 길이 열리는 등 여성에 유리한 일부 조항이 추가됐다. 하지만 호주제 폐지를 외치고 동성동본 불혼에 반대한 그는 이때부터 유림들의 ‘눈엣가시’가 됐다.

“75년 성균관대로 옮겼는데 나에 대한 유림의 반발이 극심했습니다. 집으로 전화해 협박하고 ‘당신은 매국노다’, ‘지구를 떠나라’ 등 내용의 편지도 보내오고…. 학교 당국에 ‘저런 반유림 인사가 어떻게 성대 교수를 하느냐’고 따졌죠. 현승종 당시 총장이 나 때문에 상당히 난처해졌습니다.”

78년 그는 몇 달간 대만 정치대학에 머물렀다. “잠시 한국을 떠나 있으라”는 학교 측 권유에 따른 것으로 ‘유배’나 다름없었다. 귀국 후엔 한동안 활동을 자제했다. 그러나 신문 인터뷰에서 “동성동본 불혼 규정은 잘못”이라고 말한 게 그만 화근이 됐다. 또다시 유림이 들고 일어나자 성대도 더 이상 감싸줄 수 없었다. 81년 그는 쫓기듯 연세대로 옮겼다.

“내가 성대에 사표를 냈다니까 학생들이 흥분해 학교 측에 항의했어요. 이게 몇몇 신문 사회면에 크게 기사화돼서 학교 측이 당황했죠. 그땐 교수가 학교를 옮기려면 이전 대학에서 ‘전출동의서’를 써줘야 하는데, 성대가 갑자기 사표 수리를 철회한 겁니다. 이미 연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는데…. 내 사정을 들은 당시 문교부가 ‘김 교수의 경우엔 전출동의서가 필요없다’고 해 겨우 곤경에서 벗어났습니다.”

새 보금자리를 찾은 그는 활발히 연구하고 발표했다. 한국가족법학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민주화로 정치적 환경도 많이 좋아졌다.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된 88년 그는 여당이던 민정당의 김장숙 의원 부탁으로 가족법 개정안을 만들어 국회에 넘겼다. 그의 소신과 연구 성과가 집대성된 ‘결정판’이었다.

해가 바뀌자 국회 법사위원장이던 평민당 조승형 의원이 그를 찾았다. “개정안을 검토했는데 호주제 폐지는 곤란합니다. 대신 호주의 모든 권리·의무를 없애 하나의 상징으로만 남겨 놓겠습니다. 동성동본 불혼 폐지도 안 되겠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정치인들의 의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 듯했다. 그나마 호주제가 ‘껍데기’만 남는다는 데 위안을 느꼈다.

93년 출범한 김영삼정부는 호주제와 동성동본 불혼 폐지를 공약했다. 법무부 산하에 ‘민법개정특별분과위원회’가 설치돼 가족법 개정에 착수했다. 위원장은 김주수가 맡았다. 위원회 활동은 김대중정부로 바뀐 99년까지 이어졌다.

결국 호주제는 2005년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고서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성동본 불혼 규정도 97년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효력을 잃었다. 국회는 2005년 3월 민법을 개정하며 두 조항을 삭제했다. 그가 ‘없애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꼭 50년 만이었다.

민법개정위원장 시절 그는 ‘이혼 후 친권’ 문제도 검토했다. “당시 대법원 판례가 ‘이혼 후 미성년 자녀를 혼자 키우던 단독 친권자가 사망하면 생존하는 다른 부모의 친권이 자동 부활한다’는 것이었죠. 난 생각이 달랐습니다. 아이의 복리를 위해선 생존하는 다른 부모가 친권을 행사할 적격자인지 아닌지 심사 절차가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친권 자동회복에 반대했는데, 법원에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죠.”

법무부는 최근 자격 없는 부모의 친권 회복을 막는 민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지난해 최진실씨 사망이 계기가 됐다. 그의 ‘선견지명’이 빛나는 대목이다. 마침 이번 법무부 개정안을 주도한 김상용(46) 중앙대 법대 교수는 그의 아들이다. 부자가 대를 이어 우리 가족법 가다듬기에 뛰어든 셈이다.

“아들은 연대를 다녀 학부와 대학원 때 내가 직접 가르쳤죠. 나와 상관없이 스스로 민법을 택했고, 독일 유학 시절 가족법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어요. 노무현정부 들어 또 민법개정위원회가 생겼는데, 나 대신 아들이 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올해 81세지만 정정하다. 93년 정년퇴임 후에도 겸임교수로 지난해까지 경희대 강단에 섰다. 인터넷과 이메일을 자유롭게 쓰고 워드 프로세서로 논문을 작성한다. 날이 좋으면 아내와 수유동 집에서 가까운 4·19국립묘지나 북한산 기슭으로 산책을 다녀온다. 요즘도 독서와 연구로 하루 3∼4시간을 보내는 등 학구열은 끝을 모른다.

“64년 펴낸 ‘친족상속법’ 교과서는 계속 개정판을 찍고 있습니다. 몇해 전부터 아들과 공저로 해서, 새롭게 바뀐 부분은 김상용 교수가 주로 손을 보지만 내가 아직 관여해요. 요새는 책을 오래 보면 눈이 아파 공부가 예전 같지 않아요, 허허.”

글 김태훈 기자, 사진 전신 인턴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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