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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차맥] <33>불교의 길, 차의 길 ⑪ 가장 오래된 가야의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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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3-26 17:24:03 수정 : 2012-03-27 00: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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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쓰촨·윈난 등 양쯔강 유역이 茶 원산지
김수로왕 부인 허황옥이 중국서 가야로 차나무 씨앗 반입 추정
당시 차는 만병통치약이며 혼수품… ‘차례’ 전통 면면히 이어져
우리나라의 차 생활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한국은 지리생태학적 위치로 볼 때 차의 주산지는 아니다. 말하자면 차의 북방한계선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차의 생산지는 한반도의 남중부와 제주도 등지이다. 차 생산지를 꼽으라고 하면 보성, 하동, 사천, 제주를 든다. 우리 국토는 대체로 중국의 화북지방과 비슷한 위치에 있고, 고대에는 지금의 중국 동북·만주 지방을 공유했다. 중국의 차 주산지인 양쯔강 유역은 제주도보다 낮은 위도에 있다. 같은 아열대 식물인 벼와 차는 동남아시아에서 북상한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그래서 남방문화의 갈래 속에 포함된다.

허황옥의 묘비에 새겨진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駕洛國 首露王妃 普州太后 許氏陵)’.
그래서 벼와 차를 동시에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벼는 주식으로서 일찍부터 개발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차는 적극적으로 개발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차는 역시 중국 쓰촨(四川)·윈난(雲南) 등 양쯔강 유역이 원산지이고, 중국에서 차씨를 가져와서 심었으며, 심은 곳도 한반도 남부지방에 해당하기 때문에 자생적인 재배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중국에서 좋은 차를 수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이 좋은 금수강산인 한국은 차에 대한 필요성이 작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처럼 차를 일상적 음료로 사용하였던 것 같지는 않고, 기호음료로 출발하였을 것이다. 이때 기호음료란 궁중과 사찰에서 왕족과 귀족, 승려 등 상류층에서 마셨던 것을 말한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차나무가 들어온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일부 학자들 간에는 차나무의 자생설이 있긴 하지만 아직 증거와 설득력이 부족하다. 귀한 차는 차례(제사)와 헌공차(육법공양), 그리고 승려들의 참선에 도움을 주는 ‘선차(禪茶)’로 출발하였던 것 같다. 특히 선차는 중국 유학승들로 인해 붐을 이룬다.

그러나 선차에 앞서 신라에는 차가 있었고, 신라의 차는 남쪽에 있는 가야에서 들어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에서 발간된 ‘사대명산지(四大名山誌)’에 김교각(金橋覺), 즉 김지장(地藏) 스님 이야기가 나온다. 지장 스님이 신라의 차나무를 당나라로 가져가 안후이(安徽)성 구화산에 심었다는 기록은 흥덕왕 3년(828년) 대렴(大廉)이 중국에서 차 씨앗을 가져와 지리산 기슭에 심었다는 기록보다 100여년 앞선다.

김지장 스님의 차나무는 최근에 그 존재가 확인됐다. 따라서 신라에는 대렴 이전에 차나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장 스님은 자신의 입맛에 맞고 체질에 익숙한 차나무를 가져갔을 것이다. 이에 앞서 김화상(金和尙)으로 불리던 무상 스님의 선차지법(禪茶之法)도 신라에 차가 융성하지 않았으면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능화(李能和·1869∼1943)는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서 이렇게 썼다.

“김해 백월산(白月山)에는 죽로차(竹露茶)가 있다. 전해 내려온 이야기엔 수로왕비(首露王妃)인 허씨가 인도에서 씨앗을 가져온 것이라 한다. 장백산(長白山)에도 차가 있는데 백산차(白山茶)라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가락국에 들어오는 장면과 결혼예물 목록에는 차나무 씨를 언급한 대목은 없다. 다만 “금수능라(錦繡綾羅) 의상필단(衣裳疋緞)이며 금은주옥(金銀珠玉)에 구슬장식품과 좋은 그릇들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라는 대목에 차씨가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될 뿐이다.

김해 부근 다전리(茶田里)라는 지명이 있고, 오랜 차 농사 지역일 뿐만 아니라 가야권에 속했던 부산, 동래 일대에는 지금도 차나무들이 군데군데 자생하고 있어 옛 명성을 느끼게 해준다. ‘김해읍지’에는 “금강곡에서 황차가 나는데 일명 ‘장군차’라고 했다”고 한다.

이능화의 기록에 따라 백월산 차는 한국 차의 가장 오래된 전설로 통한다. 허왕후가 심은 차가 오늘날까지 전해질 리 없지만(한국의 기후로 볼 때) 차인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단절된 전통을 되살리는 것도 문화 전승의 한 좋은 예이다.

이능화가 말한 김해 백월산은 현재 창원시 북면 월백리이다. 백월산 인근에 구산선문의 하나인 봉림사지(鳳林寺址)가 있고, 그곳에 대엽종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아마도 선종사찰이 있는 곳에 항상 차나무가 있었던 것을 보면 허왕후의 차나무인 것을 증명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 지방에 계속해서 차를 재배한 전통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이 지방 차 민요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선동골이 밝기 전에/금당 복수 길어 와서/오가리에 작설 넣고/참숯불로 지피어서/꾸신 내가 한창 날 때/지리산에 삼신할매/허고대에 허씨할매/옥고대에 장유화상/칠불암에 칠왕자님/영지못에 연화국사/아자방에 도룡국사/동해 금강 육조대사/국사암에 나한동자/조사전에 극기대사/불일폭포 보조국사/신산동에 최치원님/쌍계동에 진감국사/문수동에 문수동자/화개동천 차객들아/쌍계사에 대중들아/이 차 한 잔 들어보소.”(김기원 ‘한국의 차 민요조사’에서)

중국 저장(浙江)성, 장쑤(江蘇)성, 장시(江西)성을 중심으로 하는 동남부 경로와 달리 중국 쓰촨성과 윈난성 등 서남부 경로 가운데 하나로 중국 쓰촨성 보주(普州)에서 허왕후가 가야로 시집올 때 차씨를 가져왔다면 신라, 백제, 고구려와 가야를 포함하는 ‘사국(四國)시대’에 가야가 가장 오랜 차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차는 중국 쓰촨·윈난 지방에서 인도를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전파되었고, 인도의 경우 대영제국 식민지 시절 일종의 재식농업의 형태로 차나무를 많이 재배하기 시작했다. 고대에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이 결혼예물 가운데 차나무 씨앗을 가져왔다고 하는 것은 신빙성이 없었지만 학자들은 그러려니 했다. 가야의 차와 그 기원은 허황옥을 중심으로 전해져 왔다. 허황옥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라고 했기에 아마도 인도에서 직접 해로(海路)로 들어왔을 것으로 짐작되었는데, 인도에서 중국 대륙, 쓰촨 지방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판명됨에 따라 가야 차의 실존은 보다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중국 쓰촨, 윈난 지방은 바로 세계적인 차의 산지이며, 일찍이 그 지방에서는 결혼예물로 차씨를 넣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이 지방에서는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미리부터 혼수품으로 차를 만들어 저장하였다. 변방 민족들에겐 차는 만병통치약이었으며 또한 혼수품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차 씨앗은 소위 ‘봉차(奉茶)’라고 하여 결혼의 예물로 보냈는데 차나무 씨앗처럼 자손이 번창할 것을 염원하였다고 한다.

아유타 공주 허황옥은 인도에서 바로 시집온 것이 아니라 중국 쓰촨 보주 지방을 거쳤으며, 그것도 당대에 온 것이 아니라 몇 대에 걸쳐 그곳에 거주하다가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거의 망명하다시피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셈이었다. 일종의 엑소더스였던 셈이다. 김수로왕과 허황옥이 맺어진 것은 어떤 매개와 사정이 있었을까. 김해김씨도 토성이 아니고 중국에서 들어온 성씨이고 보면 어쩌면 김수로왕과 허황옥은 중국에서부터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허왕후의 일행으로 따라온 오빠 장유화상은 칠불암(七佛庵)으로 들어가서 수도하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부처님에게 차를 공양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장유화상을 기점으로 본다면 우리나라 남방불교의 시작은 2세기경으로 올라가게 된다. 허왕후는 모두 열 왕자를 두었다. 큰아들 거등은 왕위를 계승했고, 둘째와 셋째는 어머니 성을 따라 허씨의 시조가 됐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가야산에 들어가 3년간 수도했다. 이들에게 불법을 가르쳐 준 스승은 장유화상(보옥선사)이었다.

허왕후와 왕자들의 전설은 대게 이렇다. 왕후가 왕자들이 보고 싶어 자주 가야산을 찾자 장유화상은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왕자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왕후는 다시 지리산으로 아들들을 찾아갔다. 오빠인 장유화상은 “아들의 성불을 방해해서야 되겠느냐. 어서 돌아가도록 하라”라고 말했다. 

김해의 장군차 잎사귀.
일곱 왕자가 수도에 전념하여 성불을 이룬 어느 날, 허왕후는 다시 지리산을 찾았다. 장유화상은 전과 달리 미소를 지으며 반가이 맞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네 아들들이 모두 이제 성불했으니 어서 만나 보거라.”

왕후는 칠불암 안으로 들어갔으나 아들을 볼 수 없었다. 그때였다.

“어머니, 연못을 보세요.”

달빛이 교교한 연못 속에 황금빛 가사의 일곱 아들이 승천하고 있었다. 그 연못이 칠불사 영지(影池)이다. 김왕광불(金王光佛), 왕상불(王相佛), 왕행불(王行佛), 왕향불(王香佛), 왕성불(王性佛), 왕공불(王空佛) 등 일곱 생불(生佛)이 출현했다하여 칠불사라 부른다. 칠불사는 후에 다성(茶聖) 초의(草衣)가 우리나라 최초의 차 백과사전인 ‘다신전(茶神傳)’을 집필한 곳이다. 칠불사는 차와 불교의 성지이다.

허황옥이 한반도에 들어오는 경로는 고고학자 김병모(金秉模) 박사의 오랜 추적 끝에 밝혀졌다. 김해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의 묘비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駕洛國 首露王妃 普州太后 許氏陵)’의 ‘보주태후 허씨릉’의 수수께끼 같은 글자, ‘보주(普州)’의 해석을 두고 그동안 고고·인류·역사학계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알고 보니 ‘보주’는 중국 쓰촨성의 한 지방 도시 안위에(安岳)의 옛 이름이었다. 안위에는 청두(成都)와 충칭(重慶) 사이의 양쯔강 지류를 끼고 있는 내륙 도시였다. 보주라는 이름은 주나라부터 송나라 기간에 사용된 이름이었다.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서기 47년 경 허(許)씨 집단은 허성(許聖)을 중심으로 수탈에 항거하는 집단반란에 가담하였고 강제이주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허성’의 ‘허’는 성씨가 아니고 세습되는 무사(巫師)라고 한다. 따라서 ‘허’는 사제를 의미하는 말이다. 한족의 입장에서 보면 이민족의 신앙지도자를 말한다. 허황옥도 따라서 브라만 계급출신의 사제나 제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이 글자의 비밀을 풀어낸 김 교수는 김해김씨 김수로왕의 후손으로 자신의 피부가 유난히 검다는 것에 의문을 가지고 자신의 혈통의 원류를 찾아보겠다는 야심을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다.

김 교수는 중국 쓰촨 보주(현 안위에) 지방을 직접 방문했는데 보주 허씨들도 어렴풋이나마 보주 출신 한 처녀가 한국 땅으로 시집가서 왕비가 되었다는 전설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고고학자의 현장답사의 일환으로 그곳 마을 뒷산 암벽으로 올라갔다. 암벽 앞으로 작은 우물이 하나 있었다. 암벽에는 ‘신정’(神井)이라고 음각되어 있었고, 그 바로 아래에 신어상 한 조가 새겨져 있었다. 음각된 글자 중에 ‘허황옥(許黃玉)’이라는 글자를 발견하게 된다. 나중에 탁본을 해독하니 다음과 같았다.

“동한(東漢) 초에 허황옥이라는 소녀가 있어 용모가 수려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다.”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결혼은 당시 국제적인 정략결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 교수에 따르면 페르시아 신화에서 가락국의 별칭인 ‘가라’(加羅),즉 ‘가라’(kara)는 만병통치약을 생산하는 고케레나 나무의 뿌리를 물속에서 보호하는 물고기 이름이다.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의 신화는 유목민들의 이동으로 인도와 중앙아시아로 퍼졌는데, 이 신어(神魚)사상은 인도 코살국의 아이콘이 되었다가 아요디아(아유타국) 주민의 이동으로 중국 남부지방으로 퍼져갔고, 그 끝이 한반도 고대사의 한 주인공인 허황옥에게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허황옥과 결혼예물 차씨, 가락국의 이름이 된 물고기 ‘가라’, 그리고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국제정략 결혼. 이것은 당시 국제적인 규모에서 펼쳐진 결혼을 통한 대문화이동 및 교류였다.

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것이 신라 제23대 법흥왕 19년(532년)으로 가락국 제10대 구형왕(仇衡王) 42년이었다. 대가야가 마지막으로 통합된 해가 진흥왕 23년이다. 일본 지역에서 친가야계인 구주왕조가 무너지고, 친백제계의 야마토(大和) 정권이 들어섬으로써 배후세력을 잃고 완전히 역사에서 가야의 존재는 사라진다. 아마도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가락국의 병합으로 인해 이 일대 가야의 차는 신라의 차가 되고, 신라의 차 생활을 일찍부터 더욱 윤택하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가야차’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은 서기 661년 3월 조서를 내린다. “가야국 시조인 김수로왕은 나의 외가 쪽 15대 조상이므로 가야국 종묘(宗廟)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한다.” 아마도 가야에서는 오랜 ‘차례(茶禮)’의 전통이 있었을 것이다. 구형왕이 왕위를 잃은 뒤 신유년(辛酉, 661년)에 이르는 60년 사이에 종묘제사의 명맥이 희미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뒤 나라를 통합하고 위무하는 차원에서 가야의 종묘전통을 부활시키도록 명했다는 기록이다. 그 후 차례의 전통은 우리 민족에게 면면히 이어졌다. 명절제사를 ‘차례’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야는 전쟁 없는 양위로 신라에게 국력을 확장하고 삼국통일을 할 결정적 기회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고급문화인 ‘차 문화’마저 넘겨줌으로써 한·중·일 삼국 가운데서 신라가 문화대국으로 성장하게 하는 견인역할을 해주었다. 아마도 신라의 차 생활은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의 차 생활이 일반화되었기에 신문왕의 셋째아들인 김지장이 구화산으로 들어갈 때 차씨를 가져가서 중국대륙에 심어 오늘날 금지차(金地茶)의 원조가 되었고, 성덕왕의 셋째아들인 김화상이 사천에서 정중종(淨衆宗)을 일으키면서 선차지법(禪茶之法)으로 선차(禪茶)의 깃발을 들게 함으로써 동아시아 차문화를 선도하게 하였다.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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