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생가·기념품들을 기대했지만 안내책자 어디에도 그는 없었다
어쩌면 그것들 모두가 내 얕은 잠의 이불을 들추고 나온 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만난 친구가 브르노의 중세 감옥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그걸 내가 들었던 건지, 혹 어느 책에서 읽은 것인지, 그 옆의 친구가 거기가 밀란 쿤데라의 고향이라고 한 건지, 그 무렵 그의 책을 읽던 내가 그런 이야길 한 건지, 세 사람이 공히 브르노에 가고 싶다고 한 건지 모두 석연치 않다. 그렇지만 그 망상의 자투리 같은 일들은 처음에는 지나가는 생각이었다가, 어느 순간 꼭 그래야만 할 일이 되었다가, 마침내 나를 브르노라는 옛 모라비아의 수도로 향하는 밤의 고속도로 위에 올려놓았다.
페트로브 성당 뒷마당에서 바라본 브르노 시내 전경. |
밤의 고속도로는 환하고 외로운 유도등들을 켜두고 나를 질주하게 만들었다. 그 끝에 내가 알지 못하는 도시, 그래서 그리운 브르노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다리에 힘이 들어갔을 것이다. 체코 프라하에서 남동쪽으로 180㎞, 브르노는 체코 경제의 심장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실은 프라하 다음으로 많은 중세 유적을 가진 도시이기도 하다.(역사적, 지리적으로 다른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슐레지엔 지역이 합쳐진 것이 체코 공화국이고, 프라하가 보헤미아 지역을 대표한다면, 브르노는 모라비아 지역의 대표다)
골목에 서면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두 개의 웅장한 첨탑을 가진 페트로브 성당이 보이는, 작은 호텔에서 나는 잠깐 눈을 붙였다. 아침 일찍 그 거리에 나섰을 때, 간밤에 지나간 비가 씻어놓은 그 골목은 어느 결벽주의자가 정리해 놓은 듯 보였다. 내리막길 아래 건물들은 비슷한 높이와 크기로 정확한 대칭을 이루며 서 있었고, 자동차들은 일렬로 오차없이 주차되어 있었다. 나는 발꿈치를 들고 그 내리막길 아래를 내려다보며 눈에 박하잎을 붙인 듯 서늘해짐을 느꼈다. 밀란 쿤데라가 태어나 자란 도시. 그러나 지금 그 도시 어디에도 그는 없다. 그는 체코의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쫓겨나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한 뒤 영영 프랑스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생가나, 기념품들을 기대했지만 안내 책자 어디에도 그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예전 밀란 쿤데라의 문장들과 마주할 때마다, 나는 그렇게 지적이고 정갈하면서 삶의 이치를 꿰뚫는 첨예한 문장을 쓰고 싶어서 거의 조바심이 났었다. 글쓰기를 배우던 시절의 내게 밀란 쿤데라는 멀리서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 같았고, 눈꺼풀에 내려앉는 새의 울음소리 같았다. 확신하건대 문장이 풍경으로 표현될 수 있다면, 그 거리의 문체는 분명 밀란 쿤데라였다. 그가 브르노를 떠나 돌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도시의 정돈된 풍경과 품위 같은 것들이 그의 대뇌 측두엽에 저장되어 있으리라. 잊었다 생각한 뒤에도 여전히 아릿한 해풍으로 남아 있는 내 유년의 바닷가가 그러하듯이.
나는 밀란 쿤데라的인 그 거리의 풍경을 필사(筆寫)하듯 카메라에 담고서, 페트로브 대성당을 향해 걸었다. 노랗고 빨간 트램이 교차하는 사거리에서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 그 골목의 푸른 집들이, 돌길이, 냄새들이 음악처럼 발목을 붙잡아서 나는 아무 카페나 들어가 앉고 싶었지만 바람에 밀리듯, 조금 더 올라가 보기로 했다. 그러자 언덕 위에 아름드리 나무들로 충만한 데니스 정원이 나왔고 성당은 그 녹음을 배경으로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중세 ‘30년 전쟁’ 동안 스웨덴군이 석 달 동안 브르노를 포위한 채 대치할 때, 지친 스웨덴 장군은 8월 15일 페트로브 성당의 정오 종이 칠 때까지 브르노를 점령하지 못하면 공격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마지막 창과 화살, 화기로 총공격을 해오는 스웨덴 군과 맞서 싸우던 브르노의 사령관은, 절체절명의 그날, 벌떡 일어나 11시에 종을 치라고 명령한다! 나는 그 종을 치던 종지기의 얼굴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그 운명적 종소리에 전율했을 브르노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지금 그 성당의 종소리를 흉내내 적는 일은 하지 않으련다. 도대체 어떤 의성어가 그날의 울림을, 파장을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스웨덴군은 그 종소리에 공격을 멈추고 빈손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날 이후, 페트로브 성당은 그날을 기념하여 매일 오전 11시에 종을 울린단다. 날마다 한 시간 빨리 낮 12시로 달려가는, 브르노는 유럽에서 30년 전쟁 동안 스웨덴을 격퇴한 유일한 도시였다. 깃털 같은 재치가 구한 수많은 목숨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성당 뒷마당에서 언덕 아래 브르노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가 이 도시를 찾은 것이 아니라, 우연의 운명적인 힘이 나를 부른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마음처럼, 날마다 한 시간 먼저 종을 치는 그런 사람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자유 광장에서 바라본 마사리코바 거리. |
성당에서 내려와 구시가지로 들어서면 체코인들이 사랑하는 건축가 안토닌 필그람이 만든 구 시청사가 나온다. 그 현관 앞 천사들 머리 위의 뾰족탑 하나를 꼬부라트린 그는 좀 장난꾸러기 같은 사람일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나! 그가 건축했다는 성 제임스 성당을 둘러보니 확실히 알 것 같다. 길고 우아한 세 개의 회랑은 천국까지 닿을 듯하고 성전에 모셔놓은 프라하의 아기 예수상은 경건하기 그지없었지만, 타워의 낮은 창 앞에는 맨송맨송 엉덩이를 내놓은 남자 조각 하나가 매달려 있다. 당시 러시아의 소유이면서 부유했던 페트로브 대성당 쪽을 향한 창문인데, 당시 비엔나의 슈테판 성당 설교단 밑에도 컴퍼스와 저울을 든 자신의 조각상을 만들어놓은 익살꾼 필그람, 그가 아니라면 그런 걸 누가 만들 수 있었을까.
슈필베르크 성의 지하 감옥의 모습. |
18세기 말에 ‘세 마리 수탉’이란 여인숙이 저 트램 정거장에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 트램이 끝날 때까지, 마지막 행인이 남을 때까지 그곳은 언제나 문을 열고 있었고, 따뜻한 빵과 수프를 내놓았고, 새벽이면 트럼펫과 드럼 소리로 손님들을 깨웠더랬다. 재개발을 하느라 그 옛 건물은 폐허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다시 세 마리 수탉을 그 자리에 만들어 놓고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다. 따뜻한 전설이 계속 이어지기를.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거리, 상점, 집들도, 그리고 나도 역사 속의 2012년을 살다간, 사진 속의 멎어버린 풍경, 멎어버린 한 사람이 될 것이고, 그렇게 아득한 ‘살아감의 절차’를 다음 주자에게 넘겨줄 것이다. 이 시간은 누군가에게 따뜻한 이야기로 전해질 수 있을까.
늦은 오후엔 아껴두었던 슈필베르크 성으로 향했다. 다시 지나가는 비가 흩뿌려 성으로 오르는 언덕길은 온통 젖어 있었다. 슈필베르크 성은 13세기 중반에 브르노의 방어를 위한 성으로 건축되었지만 지금은 시립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매표소에는 은발의 할머니가 딸과 손녀와 함께 표를 팔고 있었고, 핫도그와 터키식 커피, 체코 맥주도 함께 팔고 있었다. 큰 플라스틱 컵에 잔뜩 따라주는 체코 맥주는 차마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나는 박물관에 들어가기도 전에 젖은 간이식탁에 앉아 핫도그와 함께 찬 맥주를 들이켰고, 빗물이 빠지는 모래 바닥을 내려다보며 조금 어지럼증을 느꼈다. 이 성 한쪽 지하에는 19세기에는 혁명주의자들을, 2차 대전 때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시민들을 감금하는 감옥이 있다. 1939년에는 게슈타포에 의해 감옥으로 쓰였던 이곳, 어두컴컴한 지하 돌감옥 안에서 시대의 죄수들은 산 채로 썩어갔다. 감옥을 둘러싼 벽돌담은 40m나 되어 탈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용기를 내어 눅눅하고 차가운 감옥 안을 천천히 걸어 보았다. 나이 지긋한 가이드 할아버지가 한 무리씩의 관광객들에게 슈필베르크의 역사에 대해 들려주고 있었다.
자유 광장에서 바라본 제임스 성당. |
젖은 운동화 속의 발이 시려왔다. 그런 이야기는 술을 마시고 듣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중세의 창과 방패들, 온갖 기념이 될 만한 것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을 건성으로 둘러보고는 슈필베르크 성을 나왔다.
언덕 아래로 브르노가 가득 펼쳐져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의 고향, 옛 모라비아의 수도, 익살맞고 감동적이고 아픈 도시. 비를 품은 바람을 맞으면서 나는, 그럴 수 있다면, 나도 이 도시의 문체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미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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