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이미자 시인의 동유럽 언플러그드] ⑩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끝>

관련이슈 이미자 시인의 동유럽 언플러그드

입력 : 2012-06-07 19:45:19 수정 : 2012-06-07 19:45:19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212m 언덕 위 데빈 성…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
1809년 나폴레옹 군대 무차별 폭격으로 폐허화
일요일 오후에 만화 방송을 기다리다 그만 잠이 들어 버렸던 적이 있다. 예닐곱 살 무렵이었고, 간신히 눈을 떴는데 저녁인지 아침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열린 방문 틈으로 들이비치는 햇살은 일출 같기도 일몰 같기도 해서, 한참을 멍하니 앉았던 나는 삐죽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었다. 그날, 시침처럼 견고하고 뾰족하던 시간은 함부로 구부러진 듯했고, 이후로 나는 가끔 어제와 오늘, 아침과 저녁의 시간이 뒤섞이는 현상을 체험하곤 한다. 이곳은 저곳으로, 오늘은 어제의 문으로 열리는 환영(幻影) 속을 걷는다. 어떤 날은 정말,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눈자위가 환해지던 슬로바키아의 겨울 눈밭 속으로 걸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얼음을 머금은 듯 시원해지던 그 7월의 그늘 아래로.

데빈 성의 풍경. 지나가는 바람소리마저 들릴 것처럼 고적하다.
# 역사적인 혹은 낭만적인


브라티슬라바의 데빈 성곽을 따라 걷다가 만난 엘레나는 사진가라고 했다. 창백한 피부에 금발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전형적인 슬라브족 미녀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커다란 삼각대를 어깨에 멘 채 그녀는 돌담 너머 다뉴브를 바라보던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한국인이에요?”

돌아보니 성곽에는 그녀와 나만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카메라에 대해, 한국과 슬로바키아에 대해, 이국에서의 삶과 데빈 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데빈의 돌담에는 아직도 전쟁이 끝난 뒤의 비장함이 서린 듯했다. 그녀가 성 한가운데 남아 있는 우물에 물 한 컵을 부었고, 잠시 후 그 물소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긴 소리를 함께 들었다.

데빈 성은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정착해 살던 곳으로 아직도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어 고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귀중한 곳이다. 다뉴브강과 모라비아 강이 만나는 언덕 위(해발 212m)에 자리한 데빈 성은 오랫동안 견고한 요새로서 이 나라를 지켜왔다. 그러나 1809년 나폴레옹의 군대는 이곳을 폭격으로 부수어 버렸고, 오늘날과 같은 폐허를 남겨 놓았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외친 이 장군에게 폭격당하지 않은 나라가 없을 정도다. 그것이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는지, 그가 누린 영화는 과연 부서진 이 유구한 성들만큼이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

다뉴브강이 내려다보이는 데빈 성의 풍경. 오른쪽 위는 오스트리아 땅이다. 이 강은 흘러 모라비아 강과 만나게 된다.
지금 데빈 성에는 물을 부으면 텅 빈 바닥까지, 낡은 정신의 뺨을 때리는 듯한 메아리만 남은 큰 우물 하나와 돌무더기 언덕, 그 아래 좁은 기념관과 십자가가 남아 있는 초기 교회의 터가 있다. 언덕을 따라 돌담을 짚으며 천천히 걸어 내려가 보라. 국경 너머 불어오는 아린 강바람과 1000년의 세월을 공명하며 울리는 적막이 함께 따라 걷는다.

엘레나는 공산정권 시절의 추억 이야기, 차흐티체(체이테) 성의 바토리 백작부인 이야기, 브라티슬라바 성의 새로운 페인트 색깔 이야기까지 풀어내며 관광지로서의 브라티슬라바에 아쉬움을 느낀다고 했다. 데빈 성만 하더라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가치 있는 곳이지만, 여행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체코의 프라하 성이나 옛 시가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한적하다.

그녀의 말처럼 슬로바키아의 역사와 문화는 화려한 주변국에 묻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공산정권을 거치는 동안 잃어버린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엘레나는 그 상실감마저 사진으로 찍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푸르게 휘발하는 듯한 다뉴브강을 여러 장 프레임에 담았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경쾌하게, 그러나 조금 아쉽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오후의 태양은 둥근 망루에서 멈춰 섰고, 어느 스치는 인연에도 반짝 햇살 가루를 뿌려댔다.

브라티슬라바 성에서 내려다 본 시내 모습. 노비 모스트와 UFO 레스토랑이 보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전망만 보고 바로 내려올 수도 있다.
# 당신이 모르는 브라티슬라바

유럽에서 가장 작은 수도를 가진 나라로도 알려진 슬로바키아는 공산정권을 겪으며 문화·경제적으로 많이 위축되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자연과 소박한 문화, 따뜻한 심성을 지닌 사람들의 나라다. 이곳의 수도 브라티슬라바를 여행하려면 낮고 편한 신발을 신고 걸어다니는 것이 좋다. 화려한 건축물과 소문난 레스토랑들은 많지 않지만, 시내라고 해도 차 타고 20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도시다. 그래도 작고 고풍스런 첨탑들을 가진 역사적인 건물들이 많다.

파란 색의 블루 처치 성당, 왕들의 즉위식이 이뤄졌고 베토벤의 장엄미사곡이 처음 연주되었던 성 마틴 대성당, 예전 헝가리 왕가의 여름 궁전으로 쓰이던 대통령궁, 도시의 상징인 브라티슬라바 성과 그 가치와 역사를 논할 수 없이 귀한 데빈 성까지.

보통 여행자들은 다뉴브 강변의 국립극장에서부터 시작해 성 마틴 성당, 옛 시가지 곳곳의 재미있는 동상들을 보고 브라티슬라바 성에 오르곤 한다. 운이 좋다면 흘라브네 광장에서 수시로 열리는 여러 축제를 즐길 수도 있고, 핑크빛 시청사 분수대 앞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이 도시의 시장님과 마주칠 수도 있다.

국립극장 앞 분수대. 브라티슬라바 시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수로 손꼽힌다.
혹은 국립국장 앞에서 “Little big city(작지만 큰 도시)”라고 옆에 적어놓고 돌아다니는 빨간 꼬마 기차를 타고 옛 시가지의 유적지와 성당들, 브라티슬라바 성까지 한 바퀴 돈 다음, 버스를 타고 데빈 성에 갔다가 노비 모스트(우리말로 ‘새로운 다리’란 뜻’) 다리 위 UFO 전망대에서 해거름의 다뉴브강을 바라보기. 잠깐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정도의 일정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걸음을 멈추게 되면, 옷깃을 풀고 한숨을 돌린다면 이 도시는 전혀 다른 낯빛으로, 전혀 다른 언어로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화려한 쇤브룬 궁전이나 프라하 성을 보고 난 후라면 브라티슬라바 성은 밋밋하게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갈한 정원에 핀 키 작은 꽃들과 눈 맞추고, 성 앞을 도도히 흘러가는 다뉴브 강의 물살에 귀 기울이다 느릿느릿 언덕을 내려오면, 더욱이 그 밤이 달빛이 근사한 날이라면 왜 이곳에서 베토벤이 월광 소나타를 만들 수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어두컴컴하고 조용한 이 도시에서 은빛, 금빛 주렴처럼 찰랑대는 달빛이 귀를 적시는 환영은 그런 날에만 허용되는 사치스런 체험이다.

또 버스터미널 근처, 18세기에 지어진 온드레이스키 친토린 공원묘지의 잘 익은 고요는 늙은 나무 사이에서 산책자들을 기다리고, 도시에서 가장 큰 즐라테 피에스키(‘황금 호수’라는 뜻) 호수 옆에는 해산물 요리가 일품인 식당이 있다. ‘공산당 다리’라고도 불리는 스타리 모스트(‘낡은 다리’라는 뜻) 다리를 걷다 한가운데 서면, 난간 아래로 다뉴브 강의 진짜 낯빛을 가까이 볼 수 있고, 그 강변의 달빛공원은 옛 시가지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지점이다.

역피라미드 모양의 시내 라디오 방송국도 특이하지만, 산꼭대기 텔레비전 송전탑 위의 회전 레스토랑은 브라티슬라바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주고, 슈퍼마켓 어디서나 살 수 있는 자두 증류주인 슬리보비차는 독한 만큼 맑고 향기로운 술이다. 그리고 그 술만큼 맑고 향기로운 슬로바키아 사람들은 낯을 좀 가리는 편이지만 그래도 금세 마음을 열 줄 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들은 그랬다. 하여 나는, 이 도시의 숨겨진 낭만과 멋은 지나치게 저평가된 것이 확실하다고 결론 내린다.

사실 이 글은 제대로 된 여행기가 아니라 슬로바키아 사람들에게 정이 든 어느 여자의 편협한 기록, 그리움의 녹취록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곳을 스치지 못했고 머물렀으며, 이방인으로 뿌리 없는 물풀처럼 부유한다고 느끼다가도 마음에서 하얀 뿌리가 자라나 그 땅에 스며들고 있다고 느꼈다. 그 나라에 머무는 동안, 그 하루하루는 너무 익숙해서 소매며 팔꿈치가 늘어난 윗도리 같았고, 나는 그 옷을 별로 벗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 이름을 발음하면 풍경보다 먼저, 그리워서 아픈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멀리 바다 건너에서 온갖 추억들을 반추하면서, 문을 열면 그곳으로 열리는 환영을 보면서. 그러므로 나는 아직 그곳을 다 지나가지 못했다. 어쩌면 마음 한 조각은 영원히 그곳에 남아 있으리라. 그것이 이 긴 여행의 부작용일 지라도 영영.

이미자 시인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김혜수 '천사 미소'
  • 김혜수 '천사 미소'
  • 지수 '충성!'
  • 유다인 ‘매력적인 미소’
  • 황우슬혜 '매력적인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