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훼리호' 사건은 1993년 10월10일 전북 부안군 위도 인근 해성에서 침몰한 '서해훼리호'에 타고 있던 승객 292명이 숨진 사건으로 1970년 12월 15일 운항중 침몰해 323명 사망한 남영호사고과 더불어 국내 여객선 대표적인 사고이다.
특히 '서해훼리호' 사건은 110톤 규모로 탑승 정원이 221명이었지만 사고 당시 악천후로 위도에 며칠간 고립됐던 여행객들이 몰려들어 정원에 141명을 초과한 362명(승객 355명, 선원 7명)을 승선시켰다.
또한 사고 당일 기상은 북서풍이 초당 10~14m, 파고가 2~3m로 여객선이 정상 운항하기 힘든 날씨였음에도 운항을 강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대표적 인재(人災)로 손꼽힌다.
당시 서해 페리호는 항해사가 휴가 중이어서 갑판장이 항해사의 업무를 대신했으며, 비상시 구명장비 사용법을 알려야할 안전요원도 고작 2명 뿐이었다. 전복 사고 당시 선체에 설치된 구명정도 4대중 1대만 작동했다.
사고 직후 위급상황을 통제한 사람도 없어 구조요청도 하지 못했으며, 생존자들은 구명장비가 어딨는지 몰라 아이스박스에 매달려 목숨을 부지하기도 했다.
서해훼리호의 사고 원인으로는 스크류에 어망이 걸려 엔진이 정지된 상태에서 높은 파도에서 전복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이번 진도 여객선 침몰 사고 역시 인재가 화를 키웠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청해진해운 소속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 병풍도 북쪽 3㎞ 해상에서 침몰 중이라는 신고가 전남소방본부에 처음 접수된 것은 16일 오전 8시 52분쯤. 하지만 배가 1시간여 전부터 기울기 시작했다는 증언이 잇따르는 등 사고 초기 미숙한 대처가 인명피해를 키운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게다가 첫 신고자는 승무원이 아니라 배에 타고 있던 학생의 학부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 해상관제센터로 세월호에서 초단파무선통신(VHF)으로 "지금 배가 넘어간다"는 최초 신고가 들어온 것은 오전 8시 55분으로 최초 신고보다 3분이 지나서다.
또한 세월호의 침몰 원인이 정확히 규명되지 않아 의문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우선 세월호가 전날 밤 야간 출항을 강행한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당초 15일 오후 6시30분 출발 예정이던 세월호는 안개 등으로 인해 오후 9시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때문에 세월호가 운항시간 단축을 위해 정기항로를 벗어났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해양수산부는 선박자동식별장치(AIS) 분석자료를 근거로 세월호가 항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한 구조된 승객들이 하나 같이 침몰 전 '꽝'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때문에 암초 충돌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국립해양조사원은 여객선이 침몰한 지점 주변에 뚜렷한 암초가 없었다고 밝혔다. 다만 선박 최초 사고위치와 침몰위치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세월호가 운항한 항로가 확인돼야 암초 충돌 여부가 확인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밖에 사고가 난 세월호에는 평소 운항을 맡던 선장이 아닌 대체 선장이 투입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사고와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하지만 선사측은 "교대 선장은 8년 전 해당 선사에 입사해 인천~제주 항로만 전담운항한 선정으로 이로 인한 문제는 없다"고 밝혔다.
<뉴스1>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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