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근면·성실' 이는 학창시절 도덕 수업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던 단어다. 특히 "사람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말은 어른들이 아이들을 훈육할 때 자주 쓰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한국 사회에선 이런 얘기가 현실적으로 선뜻 와 닿지 않는 게 사실이다. 실제 대한민국에서 정직하게 살면 어떤 시련과 고통을 받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한 사건이 있다. 이 사건 피해자의 신상이 털린 것은 물론, 악성루머가 퍼지고 사실상 직장까지 잃을 위기에 처했다. 설령 직장으로 복귀해 다시 일을 시작한다 해도 사측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계속 근무하는 것이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해당 사건의 피해자는 누구일까. 바로 '땅콩 회항' 사건의 당사자 중 1명인 대한항공 박창진 사무장이다. 그는 최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 대한항공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날 방송 제작진은 (오랜 망설임 끝에 제보를 결심했다는) 한 남성으로부터 전해받은 USB에 담긴 녹취파일을 공개했다. 해당 파일에는 ▲‘중년 남성들이 국토교통부 조사에서 입을 맞추라며 은밀한 지시를 내리는 내용’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부사장의 지시가 아니라고 진술해라’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절대 잊지 않겠다’ 등 회유를 암시하는 말이 담겨 놀라움을 자아냈다.
이에 한 남성은 “이제 나는 거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이야기하겠다”며 흐느꼈다. 이 울음 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박창진 사무장이었다. 이에 제작진은 박 사무장을 만나 사실에 대해 물었고, 그는 “다수의 간부들이 있는 자리에서 내가 끝까지 못하겠다고 할만한 힘이 그 당시엔 없었다”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녹취에 등장한 중년 남성들은 사측에서 기획한 시나리오대로 진술을 하면, 뒷일은 회사에서 무마해 줄 것을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 거짓 진술하면, 대학교수 자리 보장?
아울러 이날 방송에서는 ‘땅콩 회항’ 여객기에 탑승했던 승무원들이 검찰 조사가 진행된 날 '소리 없이' 웃고 있는 한 여승무원의 모습을 공개했다. 검찰 조사를 마친 후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탄 해당 여승무원 곁에는 대한항공 관계자들이 함께 탑승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박 사무장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여승무원들은 그 상황에 대해 본인이 직접 욕설도 듣고 파일로 맞기도 했지만, 자기네들은 그런 적이 없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번 사건이 잠잠해지고 나면 모 기업이 주주로 돼 있는 대학교에 교수 자리로 이동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박 사무장은 뒤늦게나마 사실을 밝히려 한 계기를 설명했다. 그는 "사건 발생 직후에는 간부들의 지시에 따라 진술했지만, 자신에 대한 속칭 ‘지라시’가 돌고 있다는 것을 지인을 통해 뒤늦게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해당 지라시에는 사내에서 박 사무장의 평판이 좋지 않고, 승무원과 이른바 ‘엔조이’를 즐기며 성희롱을 일삼는 등 품행이 문란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지라시의 내용은 사실과 달랐다. 대한항공 전·현직 승무원 모두 박 사무장에 대해 “강직한 면이 있다. 동료 의식이 굉장히 강하고, 같이 비행하는 승무원들을 챙겨줘야 한다는 의식이 강한 분이다”, “여승무원과 어깨만 부딪혀도 사과하는 스타일”이라며 입을 모았다. 이와 관련, 박 사무장은 “지난 18년간 대한항공을 다니면서 누가 인정하지 않아도 나는 이 회사를 대표하는 승무원이라는 마음으로 근무해 왔고, 한 번도 이런 생각을 버린 적이 없다”며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서 (TV)케이블을 끊고 안보여 드릴 정도였지만 결국 아셨고, ‘내 아들이 죄 지은 게 없다면 나는 떳떳하다’고 말씀하셨다”며 고개를 떨궜다.
◆ "10억 생기면, 1년 정도 감옥 들어간다"
한편, 우리나라 성인들의 정직·윤리 수준이 청소년보다도 낮아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는 월드리서치에 의뢰해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2014년 9월부터 1개월간 온라인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정직 지수'가 100점 만점에 58.3점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는 작년에 조사된 청소년의 정직 지수 74점보다 15.7점 낮게 나타난 것이다.
투명사회운동본부는 '10억이 생긴다면 잘못을 저지르고, 1년 정도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탈세를 해도 괜찮다' 등 정직과 관련된 25개 질문을 응답자들에게 제시하는 방법으로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청소년의 33%만이 '10억이 생긴다면 잘못을 하고 1년 정도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다'고 응답한 반면 ▲20대는 44.7% ▲30대는 43% ▲40대는 36.1% ▲50대 이상은 32.5%가 '괜찮다'고 답했다. 또 '이웃의 어려움과 관계없이 내가 잘 살면 된다'는 질문에서도 20대는 54%가 '괜찮다'고 답했으며, 30대는 55.2%, 40대는 41.2%, 50대 이상은 36.8%가 '괜찮다'고 답했다. 청소년은 29% 만이 '괜찮다'라고 응답했다.
투명사회운동본부 측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경쟁과 성공 일변도의 가치관, 교육 현실이 도덕적 가치를 우선 순위에서 밀어내고 있다”며 “이 때문에 성인의 정직·윤리 의식이 떨어졌고 청소년에게도 악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 부자 되는 것 > 정직하게 사는 것
이와 함께 국내 30세 이하 젊은 층의 10명 중 4명이 정직하게 사는 것보다 부자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투명성기구 발표에 따르면 2012년 7월부터 11월까지 약 4개월동안 전국 15~30세 남녀 103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부자가 되는 것과 정직하게 사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묻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 중 40.1%(409명)가 '부자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답했다. 반면 31세 이상 98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같은 조사에서는 '부자가 되는 것이 정직하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응답이 31%(300명)로 나타났다.
한국투명성기구 관계자는 “이번 조사 결과는 우리나라가 청렴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며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육 프로그램에 반(反)부패 청렴성이 관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설문조사의 신뢰수준은 95%, 표준오차는 ±3.1% 등이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