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겨울, 오랜만에 만난 한 친구가 술자리에서 헛웃음을 지으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교제 중인 남자가 메신저 대화 중 ‘일베 용어’(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에서 쓰이는 말)를 여러 차례 사용했다는 것이다. 옆에 앉은 다른 친구는 불콰해진 얼굴로 “미쳤네, 미쳤네”를 반복하더니 “헤어져”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기억이 떠오른 건, 얼마 전 TV에 방영된 ‘개그콘서트’ 속 한 코너 때문이다. 아빠와 네쌍둥이로 분한 연기자들이 나와 웃음을 주는 코너인 ‘사둥이는 아빠 딸’에서 최근 ‘김치녀’라는 일베 용어가 나와 한동안 논란이 됐다. 새해 목표가 뭐냐는 아빠의 물음에 네쌍둥이 중 하나가 “난 꼭 김치 먹는 데 성공해서, 김치녀가 될 거야”라고 말해 웃음을 유도했다. 그러나 방송 직후, 끌려 나온 건 “PD가 미쳤구나” “개그맨들 요즘 일베하냐” 등 거센 비난뿐이었다.
사진 = 방송화면 캡쳐 |
김치녀는 혐오의 단어다. ‘쪽바리’(일본인을 비하하는 속어), ‘검둥이’(흑인을 비하하는 속어)처럼 한국 여성에 대한 증오를 담은 말이다. 일부는 이런 미움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경제적 수준에 걸맞지 않게 사치를 하는 여자’, ‘성을 미끼 삼아 이득을 취하는 여자’ 등 미움받아 마땅한 여자들이 넘쳐난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망상일 뿐이다. 일본의 프랑스문학자인 오쿠모토 다이사부로는 “여성 혐오의 소유자는 여성에 대해 무관심하게 있을 수 없다는 점이 약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성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얄팍한 경험 위에 조야한 언어 감각이 버무려진 결과물이 김치녀다.
명품 가방을 받고 화를 푸는 여성 캐릭터를 자주 활용하는 ‘개그콘서트’에 이런 것까지 기대하는 건 무리일지도 모른다. 이런 여성을 보면서 손뼉 치고 웃는 TV 밖 시청자도 마찬가지다. 진짜 문제는 일베 용어가 아니라, 그 단어를 문제의식 없이 쓰고 공감하는 태도에 있다.
일베 용어 때문에 이별을 고민하던 친구를 최근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만났다. 일베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남자친구와 변함없이 교제 중”이라며 “결혼하면 축의금을 두둑히 내라”고 농담조로 신신당부했다. 역시, 중요한 건 일베가 아니다.
김승환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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