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쭈그린 채 손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여자는 옷으로 얼굴을 감싼 채 엎드려 있다. 서기 79년 8월24일 정오,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 당시 이탈리아 폼페이의 사람들은 그렇게 죽음을 맞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로마제국의 도시문화와 폼페이’에 전시된 ‘캐스트’(화산재 속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한 석고상)가 증언하는 참상은 2000년의 시간이 멈춰버린 듯 생생해서 “어떤 사람들이었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이때부터 그들이 일궈낸 높은 수준의 문명을 증언하는 벽화, 신상과 동물상, 귀금속이 달리 보인다. 이탈리아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단초가 여기에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김영나(64) 관장은 해외에서 한국, 한국문화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해외에 전시를 한번씩 내보내면서 (현지 관람객들이) 한국 문화를 깨우치고 거기서 전공자, 뛰어난 교수가 나오면 한국을 선전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성과가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만 연구하고, 너희들은 왜 모르냐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장기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문화재의 해외 전시가 뿌리가 튼튼한 한류 형성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지난 23일 서울 용산구의 박물관에서 김 관장을 만났다. 박물관 용산 이전 10주년에 대한 소회, 문화재 관련 예산에 대한 아쉬움, 관람 문화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국립중앙박물관 김영나 관장이 지난 23일 서울 용산구 박물관 관장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해외전시, 유물 구입 예산 확충, 관람 문화 등 현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전시실이 커졌다.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다 채우나 걱정할 정도였다. 특별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 국내전시뿐만 아니라 세계 문명 전시를 할 수도 있게 됐다. 아시아부를 만들어 관련 소장품을 늘렸고, 학예직 증원도 있었다. 무료로 전환하면서 관람객이 크게 늘어나 작년에는 350만여명이 다녀갔다. 대중적인 인지도가 굉장히 높아진 것이다. 국제 교류가 늘어 박물관에 대한 관심과 신뢰도도 올라갔다. 아시아에서는 우리 박물관이 최상급이라고 생각한다.”
-취임 5년째인데 그간 기억에 남는 사업을 꼽는다면.
“디자인팀을 만들었다. 학구적이고, 고전적이지만 재미를 유발하지 못했던 전시에 변화를 주는 계기가 됐다. 연구를 많이 해야 한다고 강조해 내부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 부분은 외부에서는 잘 모르지 않을까 싶다.(웃음) 한국의 도교문화전, 초상화전 등 기획전시는 대부분 기억에 남는다. 이제는 양보다는 질을 추구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전시를 하더라도 외국에서도 보러 올 수 있는 획기적인 것으로 하자고 강조한다. 이런 걸로 박물관의 이름을 알리고 싶다.”
김 관장은 대체로 조심스럽게 인터뷰를 이어갔다. 단어 선택에 신중했고, 민감한 현안에 대해서는 웃음으로 즉답을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입장을 밝히고, 적극적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우리 문화재의 해외전시 필요성을 강조할 때가 그랬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83호) 등 특정 유물이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해외 전시로 반출되는 것을 두고 벌어지는 논란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박물관은 올해도 해외전시를 추진 중이다.
“박물관의 임무, 설립 목적에는 해외에 우리 문화를 알리는 것이 포함된다. 외국 박물관에 한국실이 생기고 있지만, 중국실과 일본실에 비해 전시품의 질과 양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런 걸 보완하는 게 해외에서 하는 특별전이다. 한국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전통문화는 가장 중요한 소재다. 대중문화를 기반으로 한 한류는 사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것이다. 어떤 국가의 뿌리 깊은 것을 알리는 데 문화재 전시만한 게 없다.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문화가 많이 알려져 있는 것도 아니다.”
-일부에서는 길고 잦은 해외전시 때문에 유물 훼손을 걱정하기도 한다.
“훼손을 염려하면서까지 내보내는 일은 없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해외전시에 내보낼 유물의 폭을 넓히는 것이 필요한 건 사실 아닌가.
“우리가 중국, 일본에 비해 유물이 많다고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반가사유상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유물은 우리나라에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전문가들은 반가사유상을 잘 알지만, 일반인들은 모른다. 그들이 알고 있어야 한국에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거다. 해외에 한국 미술 전공자들이 별로 없다. 한국 유물을 영어로 소개한 책도 많이 부족하다. 반가사유상을 한국에 와서 보라고 할 정도가 되려면 해외에 많은 한국 미술 연구자들이 나와서 책을 많이 쓰고, 그 결과로 널리 알려질 때 가능하다. 중국, 일본은 이런 걸 많이 했다.”
유물 구입 예산의 확충은 정부의 관심이 더 필요한 부분으로 지적했다. 박물관이 유물 구입에 쓸 수 있는 예산은 39억원 정도. 지난해까지 28억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많이 늘었지만 “최고품의 도자기 한 점도 못 사는” 수준에서 여전히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좋은 박물관을 결정하는 건 뭐니뭐니해도 소장품이다. 집(박물관 건물)이 크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미국 뉴욕의 근대미술관은 구입예산이 우리의 10배다. 기본적인 유물은 이미 갖고 있으니 앞으로는 좋은 것들을 구입해서 유물 수준을 전체적으로 높여야 한다.”
“지방 국립박물관은 구입비가 따로 없고, 필요하다고 요구를 하면 우리가 구입해서 보내준다. 예산이 적다. 앞으로 100억 이상은 되어야 한다.”
-박물관에서 몇 년 전부터 진행 중인 일제강점기 자료조사사업이 더 일찍 시작되었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조선총독부의 자료를 정리하는 작업이다. 양이 방대해 그간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문서가 26만쪽, 유리 건판사진이 4만장, 조선총독부에서 수집한 게 10만점 이상이다. 광복 후 인계받은 뒤 전쟁이 나서 정리를 못했다. 무엇보다 그간 박물관을 7번이나 옮겨다닌 게 컸다. 2022년에는 마무리할 계획인데, 좀 더 빨리 했어야 한다는 지적은 우리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성과는 있었나.
“유리건판을 정리한 책이 나왔고 경주 금관총에서 발굴된 칼에서 명문을 확인하기도 했다. 올해 금관총을 재발굴하는 것도 성과다. 이런 작업은 생각처럼 빨리 안 된다. 금관총 칼에서 명문을 확인한 것도 보존과학부에서 2년 동안 작업을 한 끝에 얻은 성과다.”
-올해 9월로 예정된 ‘고대불교조각대전’을 가장 주목할 만한 전시회로 꼽은 적이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고대의 한국, 중국, 인도, 베트남 등에서 만들어진 불교조각을 총망라하는 전시회다. 8개국 19개 기관과 접촉을 하고 있고, 우리가 소장한 것까지 합해 150여점이 전시될 예정이다. 각국의 귀중한 유물들이 한데 모인다. 용산 이전 후 10년간 활발하게 국제교류를 하며 쌓아온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회가 될 거다.”
준비된 질문을 끝내고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물었더니, 잠깐 생각하다 박물관을 찾은 ‘꼬마 손님들’ 이야기를 꺼냈다. 부모들에게 이끌린 어린이, 청소년 관람객은 박물관의 주요 고객이다. 그런데 그들의 ‘지나친’ 활달함이 차분한 유물 감상을 원하는 관람객들의 불만을 사기도 한다.
“단체로 오는 경우에는 대학생 멘토들에게 안내를 시키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어요. 어린이 관람객의 상당수는 부모님들과 함께 오죠. 간혹 이 아이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박물관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교육을 집에서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대담=원재연 문화부장, 사진=서상배 선임기자, 정리=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1951년 서울 출생 ▲경기여고-미국 뮬렌버그대 미술과 졸업-미국 오하이오주립대 미술사학 석·박사 ▲덕성여대 교수, 한국미술사교육연구회 회장, 서울대 박물관장, 문화재위원회 근대문화재분과 위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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