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시대에 고대국가가 시작된다는 것은 동·서양 역사학계의 일반적 인식이다. 이때부터 역사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 편년(編年·연대를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 교과서에서도 “최초의 국가인 고대조선(기록상 단군왕검이 건국한 나라는 ‘고대조선’이었고 근대조선과 구분하려면 ‘고조선’이 아니라 ‘고대조선’이라 하는 것이 맞다. 원문 표현에 상관없이 이하 ‘고대조선’으로 표기한다.)이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건국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말대로라면 고대조선 건국 이전에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교과서에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가 고대조선 건국보다 300여년 늦게 시작된다고 되어 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상충되는 내용이 교과서에 담긴 것이다. 자체 모순일 뿐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단군신화론’과 중국의 동북공정에 부합하는 내용이란 점에서 서둘러 바로잡아야 한다.
교육부의 지침을 보면 ‘고대조선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사회과 교육과정 17쪽), ‘고대조선의 성립은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설명하고’(고등학교 한국사 집필 기준 3쪽), ‘청동기 문화의 상한선은 최근 학계에서 검증된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서술한다’(중학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 2쪽)고 되어 있을 뿐 청동기 시대의 구체적인 연대는 기술하지 않고 있다.
국정교과서인 초등학교 ‘사회 5-1’ 6쪽에는 같은 연표를 그려놓고“서기전(기원년의 표현에는 ‘서기’, ‘불기’, ‘단기’ 등이 있다. 어느 기원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 이 글에서는 원문과 상관없이 ‘서기전’으로 통일한다.) 약 2000년경부터…청동기가 등장하였다”(16쪽), “이 시대부터 사람들은 지배자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 마침내 나라가 세워졌다”(17쪽)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이어서 “청동기 시대가 시작될 무렵인 서기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대조선을 세웠다”(20, 21쪽)고 했다. 청동기 시대 시작 전에 세워졌으니 바로 앞 문장의 내용과 모순된다.
교과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청동기 시대가 시작(서기전 2000∼1500년)되어 족장사회가 나타나고, 그 족장사회를 통합하여 고대조선을 건국(서기전 2333)하였다”가 된다. 설명대로라면 고대조선의 건국은 청동기 시대가 이후가 되어야 하지만 오히려 최소한 333년이 앞선다. 모든 교과서에 이런 모순이 등장한다.
1980년대 목포대 박물관이 발굴 조사한 전남 영암 장천리의 주거지 흔적. |
과거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에는 청동기 시대 자체가 없었다며 ‘금석병용기’(석기와 철기를 함께 사용한 시기)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단군의 건국을 믿을 수 없는 ‘신화’로 만들기 위한 왜곡이었다. 청동기 유적과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이 용어는 없어졌지만 청동기 시대의 시작에 대해서 1998년 교과서(제6교과과정, 국정)까지는 서기전 10세기, 제7교과과정이 시작된 2002년도 교과서부터 지금처럼 서기전 20∼15세기에 청동기시대가 시작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편, 3차 교육과정 시기인 1981년 교과서까지는 ‘단군신화’라고 하다가 1981년 제4교육과정 교과서부터 ‘단군의 건국이야기’로 바뀌었는데, 2009년에 ‘단군신화’라는 단어가 교육과정과 검정 교과서에 다시 등장했다.
단군의 건국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화가 되고 나면, 서기전 25∼24세기의 것으로 확인(윤내현, 북한 김영근 등)된 요하문명 중 청동기 문화인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 지역의 유물과 유적, 그리고 서기전 30세기 이전 청동기 거푸집이 나온 ‘오한기 서태’(敖漢旗 西台) 유적지의 유물은 우리 역사 유물에 포함할 수 없게 된다. 지금 교과서의 고대조선 세력 범위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우리는 아직 역사시대가 되지 않았으므로 유물·유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단군의 고대조선 시대에 해당되는 이 지역의 문화를 고스란히 중국에 넘겨주게 되는 것이다.
복원된 주거지 모습. 청동기시대의 집자리 유적으로 서기전 2630, 2365년의 유물이 나와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연대 설정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문화재청 제공 |
현재 우리 교과서의 고대조선 세력 범위는 중국의 롼허(?河)까지다. 따라서 그 안에 있는 허베이성, 랴오닝성과 네이멍구자치구에 걸쳐 있는 요하문명(홍산문화와 신석기 유적을 포함한 명칭) 지역은 분명히 고대조선의 세력 범위에 포함된다.
고대조선의 영역에서 시대가 서기전 30세기 이전의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보고가 있어 일부 학자들은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시작을 서기전 30∼25세기로 잡고 있다. 사진은 전라남도 영암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청동 거푸집. 문화재청 제공 |
그런데 우리 교과서는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는 서기전 20세기에 시작되었으므로 그 전인 서기전 2333년에 단군이 고대조선을 세웠다는 얘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화가 된다. 이는 요하문명이 우리 것이 아님은 물론 북한지역조차 위만조선 이후에나 고대국가가 형성된다는 식민사학의 논리를 우리가 나서 증명해주는 것이다. 또 우리가 신화시대로 자처한 시대의 청동기 유물이 나오는 이 지역 역사는 중국의 역사가 된다.
주변국의 역사 왜곡에 적극 대응해야 할 동북아역사재단은 이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2012년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미국 의회 조사국에 보낸 중국 동북공정 ‘반박자료’(?)에서 교과서에 롼허까지 그려진 고대조선 세력 범위의 서쪽 경계선을 요하까지로 줄여 놓았다. 요하문명 지역을 고대조선의 영역에서 제외시킴으로써 중국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요하문명 지역을 자기 영역으로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옳다는 것을 확인해준 셈이다. 이 자료는 그해 12월 31일 발간되어 세계에 공표됐다.
박정학 사단법인 한배달 이사장 |
지난 1월 국민신문고를 통해 교육부, 한국교과서연구재단에 “청동기 시대 편년과 고대조선 건국 시기가 모순되는 데, 어느 것이 틀렸는가?”라고 질의를 했다.
교육부는 “삼국유사에는 서기전 2333년에 단군이 고대조선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서기전 2000년 이전 청동기 시대 유물이 발굴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교과서의 고대조선 세력 범위 내에 있는 요하문명 지역에서 서기전 25∼24세기 청동기 유물이 나왔는데 확인한 것이냐?”고 재차 질의했더니 “현재의 고고학적 성과와 문헌을 함께 기술하다 보니 모순이 발생하게 된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반도 안과 만주지역에서 모두 서기전 25∼24세기의 청동기 시대 유물이 나왔으며 대동강 유역과 츠펑(赤峰) 지역에서는 더 오래된 유적과 유물이 나왔다. 서기전 2000년경의 것을 가장 오래된 유물로 본다는 것은 무슨 근거냐?”고 추가 질의에는 지금까지 답이 없다.
한국교과서연구재단에서는 집필자의 답변을 받아 지난 3월 대답을 내놨다. “교과서는 학계의 통설에 따라 쓰여진다. 관련 연구단체나 학회 등을 통해 논의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사료된다”는 답변에 이어 “기록과 유물의 연대가 다르므로 역사 교과서에서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기술하여 소개하되,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지는 않는 태도를 보이는 전략을 쓴다. 현재 연구 과정에 있어 잘 알 수 없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학생들에게 역사기록(사료)을 기술해주면서 상상력을 자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고대조선 건국 기록은 믿을 수 없으며, 모순되는 내용의 기술을 통해 학생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추구하는 자세를 가지게 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는 궁핍한 자기합리화 논리다.
◆청동기 시대 편년을 조정할 수 있는 자료는 많다
서기전 2000년 이전의 유물은 없다는 것이 답변의 핵심이지만, 고대조선 세력 범위 안인 요하문명 지역에서 서기전 25∼24세기 청동기 유물, 특히 오한기 서태 지역과 우하량 13지구에서 서기전 30세기 이전의 청동기 거푸집이 나왔다. 북한에서도 서기전 30세기 이전의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보고도 있다. 남한 지역에서도 1974년 발굴 보고된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고인돌 유적에서 서기전 2325년인 유물이 나왔고, 1986년 목포대 박물관이 발굴 보고한 전남 영암군 장천리 주거지유적에서는 서기전 2630, 2365년인 유물이 나왔다. 윤내현, 신용하는 이를 근거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시작을 서기전 30∼25세기라는 견해를 보였다.
사마천의 ‘사기’를 포함한 30여권의 사서에는 “구려의 임금인 치우가 금속무기를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발굴 결과는 이런 사서의 기록을 뒷받침한다(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 ‘한민족의 형성과 얼에 대한 연구 참조).
문제는 우리나라 주류 사학계가 이런 발굴 성과와 기록, 그리고 이미 30여 년 전에 이를 근거로 나온 국내외 학자들의 연구 실적들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이 신화라고 한 선배들의 이론을 뒤집을 용기가 없어서다. 하루빨리 교과서의 모순된 내용을 고칠 수 있는 학문적인 절차가 진행되어야 한다.
박정학 사단법인 한배달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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