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같은 분위기 속에 국내에서도 단색화 작가들의 전시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작품가도 1년 새 서너 배 급등했다. 일부에서는 너무 과열 양상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우려할 정도다. 덩달아 단색화 논쟁도 뜨겁게 달궈지고 있다. 이론의 뿌리가 없다느니, 상업화랑들의 ‘물건 만들기’가 아니냐느니 냉소적인 시각도 많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일군의 작가들이 나름의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론적 토대가 약하다고 무조건 깎아내리는 처사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그것은 작가들의 책임이라기보다 평단의 게으름으로 돌려야 한다. 이제라도 평단이 나서 건설적인 단색화 이론화 작업에 나서야 한다. 모처럼 찾아온 한국미술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문화는 흘러가고 흘러오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우열도 없다. 그저 외향이 비슷하다고 우리 미술문화를 짝뚱 취급하는 자세는 버려야 한다. 문화수용은 비슷하게 시작해서 자기것을 만드는 과정이다. 세상의 모든 문화에 예외가 없다.
한국의 단색화는 서구의 추상화와는 괘를 달리한다. 서구가 구상에서 추상으로 왔다면 한국의 단색화는 구상의 매개체 없이 전면적 추상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원로작가 박서보는 그림을 수신의 도구로 삼고 있다. 수신의 ‘찌꺼기’가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는 단색화라고 이름 붙인 것은 색이라는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작명이라 했다. 박 화백이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수신수단이다. 행위의 무목적성, 행위의 반복성, 물질성과 정신성의 합일이 단색화라고 정의했다.
건설적인 단색화 논의를 기대해 본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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