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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이자 모스크… 동서양의 역사를 품다

입력 : 2016-02-23 20:53:29 수정 : 2016-02-23 20:5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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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 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134〉 하기아 소피아 성당 # 천년 동안 숨어 있던 비잔틴제국의 뒷이야기

최근 무척 재미있는 책을 한 권 읽었다. 프로코피우스(Procopius)라는 6세기의 역사가가 쓴 ‘비잔틴 제국 비사’라는 다소 선정적인 제목의 책이다. 비사(秘史)란 결국 ‘뒷담화’일 것이다. 그러나 “없는 데서는 나라님 욕도 한다”지 않는가. 한 해의 희망을 다지는 신년 벽두에 읽기엔 좀 꺼림칙하다는 마음의 소리를 꾹 누르며 책을 펼쳤다.

그건 약 1500년 전에 지금은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에 자리를 잡고 로마의 역사를 이어가던 동로마제국,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 시절의 이야기다. 주로 황제와 황후 테오도라(Theodora), 그리고 황제의 명에 의해 무수한 전쟁을 수행했던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장군과 그의 아내에 대한 강도 높고 적나라한 험담이 주요 내용이다. 저자는 벨리사리우스의 비서 겸 법률고문이었다.

동서양의 문화가 공존하는 하기아 소피아는 1453년 정복자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모스크가 되었다가 1930년대에 박물관이 되었다.
벨리사리우스는 가히 ‘전쟁의 신’이라 불릴 정도의 명장이었다. 그는 사분오열되어 변방의 야만족에게 빼앗겼던 전성기 로마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 회복하고 지탱할 뒷심이 부족해 결국 이내 다시 내주었지만. 그래서 역사가들은 그를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이후 가장 위대한 장군이라 평가한다. 사실 카이사르가 활약한 시기에 로마는 전성기였고,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군인들과 함께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는 로마가 한참 기울어지고 쪼개진 상황에서, 주변의 야만인들을 돈으로 고용한 오합지졸 용병들과 함께 전쟁을 했다. 그 상황에서도 주변의 페르시아, 반달족, 고트족 등 사나운 적들을 상대로 많은 성공을 거두었으니 벨리사리우스는 얼마나 대단한 장군이었겠는가.

이런 용맹한 장군의 모습이 이 책에서는 여지없이 깨진다. 더군다나 바로 옆에서 벨리사리우스를 보좌했던 비서가 쓴 이야기이니 더욱 그렇다. 그는 아내 안토니나에 대한 사랑에 눈이 멀어 전쟁터까지 데리고 다니고, 중요한 순간에 어이없는 판단을 한다. 또한 바람피우는 아내를 보면서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오쟁이진 남편’으로 묘사된다. 책을 읽다 보면 더없이 한심하고 측은한 바보 남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프로코피우스가 그 이전에 썼던 『전쟁사』라는 책에서는 벨리사리우스를 아주 딴판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벨리사리우스가 집을 나서 궁정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매일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했다. 그가 행차할 때는 마치 떠들썩한 축제 행렬이라도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가 길을 나서면 늘 반달족, 고트족, 무어족이 몰려와 호위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근사한 풍채에다 키가 크고 얼굴까지 기막히게 잘생겼다. 하지만 행동거지는 온순했고 태도는 아주 상냥해서 가난한 사람이나 명성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건 좀 심하다 싶다. 남들도 그럴까봐 그는 비사의 서문에서 이런 변명을 한다.

“독자도 아시겠지만, 역사가가 특정인물들이 살아 있을 동안 그들이 한 일을 진실하게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내가 진실을 기록했다면 그들이 풀어놓은 밀정들이 그 사실을 알아채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 것이다. 나는 가장 가까운 친지들조차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난 책들에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진실을 숨기고 번지르르한 겉치레만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아네크도타(Anecdota:내놓지 않은)라고 한다. 정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싶었겠지만, 살아생전에는 출간하지 않고 은밀히 보관했다. 어떤 경로로 보존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623년에 바티칸 도서관 사서가 이 책을 발견하고 세상에 내놓아서 많은 사람들이 유스티니아누스의 다른 모습을 알게 되고, 비잔틴제국에 흥미를 느끼게 되고, 벨리사리우스의 아킬레스건을 알게 된다.

유스티니아누스 시대(537)에 만들어진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는 이후로 약 100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하나님의 성전이었다.
# 최고의 황제이자 가혹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프로코피우스는 팔레스티나의 카이사레이아에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하고 당시 세상의 중심인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벨리사리우스의 측근이 되어 전쟁터까지 따라다닌다. 그가 550년에 쓴 ‘전쟁사’는 벨리사리우스를 생생하게 묘사하며 그를 다시 보기 힘든 영웅으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560년에는 아무래도 황제가 신경쓰였는지, 엄청난 도시 재건을 수행한 황제의 업적을 칭송하는 ‘건축론’을 쓴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지금의 훌리건과 같이 히포드롬이라는 경기장에서 거행되는 전차경기를 응원하는 그룹에서 시작한 청색당과 녹색당의 다툼으로 촉발된 ‘니카의 반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재건되었다.

벨리사리우스에 대한 아부(전쟁사)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 대한 찬양(건축론) 사이에서 역사에 대한 소명의식 때문이었는지, 혹은 기계적 균형감각 때문이었는지 그는 559년에 ‘비잔틴제국 비사’를 쓴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왕궁 옆 대나무 숲’이다.

“그의 성정은 우둔함과 교활함을 부자연스럽게 뒤섞어 놓은 듯했다…. 이 황제는 부정직하고, 기만적이고 거짓되고, 위선적이며, 이중인격자에, 잔인하고, 자기 생각을 감추는 데 능하고, 기쁘거나 슬프거나 절대 울지 않고, 다만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거짓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자였다.”

물론 프로코피우스의 시각이 더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적으로 그가 남긴 업적을 보면 그가 그렇게 악마적이고(프로코피우스는 심지어 진짜 악마라고 진지하게 증언한다.) 교활한 황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유스티니아누스는 위대한 황제이다.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정복전쟁을 통해 로마의 옛 명성을 찾고자 노력했고, 법을 정비하여 유명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간행한다. 또한 반란으로 황폐화된 콘스탄티노플을 눈부시게 정비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에 하나로 꼽히는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를 만든다. 덕분에 그는 중세 로마제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교회에 대한 열정과 헌신으로 동방정교회로부터 성인의 칭호와 함께 ‘대제’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다만 정복한 나라들을 지속적으로 다스릴 능력이 없어 결국 다시 영토를 내주거나 보상해 주어야 했고, 전쟁과 대규모 토목공사 등을 위한 지출이 커서 재정은 불안했고, 이 때문에 귀족이나 부유층에게 막대한 세금을 걷거나 아예 재산을 빼앗기도 했고, 말년에는 인기가 높은 벨리사리우스 등 신하들을 편집증에 가깝게 의심해서 원성을 사는 등 약점이 많은 황제였다.

사실 그는 그렇게 거창한 집안에서 잘 키워져서 황위를 계승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일리리아라는 지금의 루마니아 근방 지방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역시 그 지방 출신이며 군인으로 출세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진출한 삼촌이 있었기 때문이다.그 삼촌은 유스티누스1세인데 아나스타시우스1세 때 경호대 사령관 자리까지 올라간다.

글자도 모르는 그가 로마제국을 통치하게 된 것이다. 유스티누스1세가 9년 동안 쫓겨나지 않고 죽을 때까지 황위를 지킨 것은, 그가 데리고 와서 공부를 시키고 키웠던 조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제를 대신해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고 급기야는 공동황제의 자리에서 일을 하다 숙부가 죽자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하게 된 이가 바로 유스티니아누스1세이다. 그리고 그는 38년간 로마를 통치한다.

하기아 소피아 단면도. 네 개의 볼트를 교각처럼 세워 돔을 받치고, 펜던티브가 이어서 받아내며 완성한 당시 가장 첨단적인 기법을 사용한 구조를 엿볼 수 있다.

# 동서양의 역사를 품은 위대한 문화유산, 하기아 소피아

우리를 형제의 나라로 생각하는 터키에 간 적이 있다. 우리와 생긴 것도 무척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거리도 무척 먼데, 그들은 어디서나 우리를 무척 환대해 주었다. 조금 의아했지만 무척 고마운 일이었다.

터키는 뭐랄까 아주 낯설지만 편안한 느낌이 드는 나라였다. 아시아와 유럽 양 대륙에 걸쳐 있으며, 그리스와 로마와 그리고 이슬람의 문명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그렇지만 파열음이 크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 느낌은 터키의 대표적인 도시인 이스탄불에 가면 더욱 확연하게 느껴진다. 이슬람에 의해 정복되면서 이름이 바뀐 그 도시가 바로 예전의 콘스탄티노플이다. 무척 현대적인 대도시이면서도, 시간을 멀리 뒤로 돌려서 아라비안나이트의 이야기가 흘러나올 것 같은 뒷골목이 공존하는 곳이며, 많은 관광객과 일상이 섞여 있는 곳이다. 마치 지구의 다양한 공간과 시간을 모아서 압축하여 넣은 수정구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스탄불에 가면 가장 먼저 가게 되는 하기아 소피아가 있는 언덕은 그 핵심이 되는 지역이다.

예전에 전차 경기장이었던 술탄 아흐메트 광장에는 무척 많은 시간이 모여 있다.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와 델포이 아폴론신전에서 가져온 청동 뱀기둥, 그리고 오스만제국의 궁전인 톱카프 궁전과 블루 모스크로 불리는 술탄 아흐메트 사원이 함께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하기아 소피아가 있다. 그 이름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온 ‘성스러운 지혜’를 기린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하기아 소피아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537)에 만들어진 것이며, 이후로 약 100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하나님의 성전이었다.

니카의 반란으로 콘스탄티노플은 폐허가 되고, 원래 있었던 하기아 소피아는 불타버렸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폐허 속에서 주저하지 않고 거대한 성당을 생각했고 바로 실행에 옮긴다. 그리고 현장을 수시로 방문하며 독려하여 5년10개월 만에 이 성당을 완성한다. 당시로는 가장 첨단적 기법을 사용한 ‘하이테크 건물’이었다.

그의 꿈은 당시 명성이 높았던 안테미우스와 이시도루스라는 위대한 건축가를 발탁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사실 그들은 원래 건축가나 공학자가 아닌 수학자이며 과학자였다. 그들은 아주 복잡한 입체의 구성을 독특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 즉 그들은 기존의 바실리카(Basilica)식 교회의 형식을 과감히 버리고 중앙 돔(dome:반구형 지붕이나 천장) 형식을 취한다.

물론 돔 형식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판테온(Pantheon)처럼 형틀을 만들고 콘크리트를 부어 굳히고 그 위에 벽돌을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네 개의 볼트(vault:아치에서 발달된 반원형 천장·지붕을 이루는 곡면구조체)를 교각처럼 세우고 그 위에 경량벽돌을 쌓아 올린다. 또한 돔을 정사각형의 틀로 받치고, 그 틀은 아치와 아치의 틈을 메우는 펜던티브(pendentive:오목한 삼각형 모양으로 두 벽면의 모서리에서 돔의 기초면에 이어지는 구조)가 이어서 받아내며 완성된다.

중앙에 기둥이 없는 높이 50m가 넘는 거대한 돔은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공간과 돔 하부에 뚫려 있는 무수한 창으로 빛이 들어와 중앙의 돔은 마치 하늘에 둥실 떠 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성당을 다 짓고 성당에 들어서며 “이 위대한 작업을 해야 한다고 내게 영감을 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오, 솔로몬이여! 나는 이제 그대를 넘어섰도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의 마지막 영광이었으며, 절정과 동시에 슬프게도 빛을 잃기 시작하는 꽃과도 같았다. 하기아 소피아는 1453년에는 정복자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모스크가 되었다가 1930년대에 박물관이 되었다. 성당을 둘러싼 네 개의 미나레트(minaret:이슬람교 예배당의 첨탑)와 회벽에 덮였다가 복원된 모자이크 등이 성당이 겪었던 운명을 증언해 준다.

임형남· 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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