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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순재 “연기란 완성 없어…죽을 때까지 새로운 몸짓 추구해야”

입력 : 2016-08-28 21:02:48 수정 : 2016-08-28 21: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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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60주년 맞아 연극 ‘사랑별곡’ 출연 배우 이순재(82)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었다. 연극 ‘사랑별곡’의 연습실이 있는 서울 은평구 구산동까지는 지하철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좀더 들어가야 했다. 연습실은 지하였다. 연극의 살림 규모를 짐작하게 했다. 2014년 이 작품에 출연했던 이순재가 내달 4일부터 10월1일까지 같은 역을 연기한다. 대배우가 화려함과 거리가 먼 무대에 오르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연극은 달리 인식하고 있다”고 했다.

“(젊은 시절) 연극하면서 처음 10년간 돈을 한 번도 안 받았어요. 그게 몸에 뱄어요. 연극 출연료는 방송에 비하면 출연료도 아니죠. 수익과 조건을 생각하면 연극을 못 해요. TV 프로그램 한 회 값도 안 되는 경우가 있는데 어떻게 하냐고. 연극이야말로 배우의 예술이기에 연극을 통해 자기 연기 영역을 펼쳐보이고 싶어서 하는 거죠.”


배우 이순재는 연극계 후배들에게 “의지를 갖고 추구하다 보면 결국 길이 생긴다”며 “당장은 힘들고 어려워도 길이 있다는 의지를 갖고 자기 연기를 키우면 장동건, 배용준은 안 되더라도 얼마든지 제2, 제3의 오달수가 될 수 있다”고 힘찬 목소리로 격려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그가 흔쾌히 출연한 데는 상대 배우가 손숙인 점도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은 이번에 50년 만에 처음 호흡을 맞춘다. 이순재는 “늘 해보고 싶던 상대”라며 “연극계에서 손숙씨의 가치가 높으니 같이 덕 좀 볼 수 있지 않겠나”라며 웃었다. 무엇보다 그는 “작품이 좋았다”고 했다.

‘사랑별곡’은 시골 장터가 배경이다. 장터에서 나물을 파는 순자는 옛 사랑을 마음에 묻어둔 채 이순재가 연기하는 박씨와 결혼한다. 남편 박씨는 옛 남자를 못 잊는 아내가 미워 젊은 시절 무던히도 가족의 속을 썩인다.

“아내가 죽은 다음 남편이 회한해요. 당신이 평생 갖고 있던 사랑을 용서하지 못해 미안하다, 내 옹색한 사랑을 용서해 달라. 옛날에 보면, 셋방에서 밤새 싸우는 부부가 있어요. 저 사람들은 왜 사나 싶은데도 살아요. 또 다른 끈끈한 부부의 정이 있는 거예요. 이들이 차이를 극복하고 잘 살기도 하지만, 응어리를 안은 채 평생 가는 경우도 있어요. 이 연극은 후자예요.”


남편으로서 이순재는 연극 속 박씨와는 달랐다. 그는 “무조건 마누라 하자는 대로 한다. 통장도 집사람이 다 갖고 있다”고 했다.

“초기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 오로지 연기를 해야 하니 집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어요.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하니. 영화를 동시에 열 편을 계약한 적도 있어요. 하루에 네 편을 찍기도 하고. 집에서 자는 시간은 한 달 중 일주일밖에 안 됐어요. 날 원하기에 최선을 다했어요. 수입도 중요했지만, 연기 욕심도 있었죠.”

이순재는 1956년 서울대 철학과 3학년 때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했다. 연기에 빠져든 건 대학 2학년 겨울이었다. 영국 거장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한 흑백 영화 ‘햄릿’을 봤다. ‘저 정도면 연기도 예술적 창조행위’란 확신이 섰다. 그는 “올리비에가 대사를 하는데 소리가 전율이 일 정도로 가슴을 찔렀다”며 “셰익스피어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야, 멋있다 싶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당시 발견한 예술성에 자신이 여전히 미치지 못한다고 여긴다. 1960년 이순재는 극단 실험극장의 창단 멤버로 소극장 운동에 참여했다. 1964년 TBC가 개국하면서 브라운관에도 얼굴을 비쳤다. 이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허준’ ‘이산’ ‘거침없이 하이킥’까지 숱한 작품을 거치며 ‘국민 할배’로 자리 잡았다. 올해는 그가 배우로 데뷔한 지 꼭 60년이다. 지난 60년을 돌아본 그는 “내가 그렇게 화려한 배우는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많은 작품을 했는데 대종상을 못 탔어요. 70년대에 영화 ‘어머니’가 후보에 올랐는데 TV배우를 영화배우와 차별하던 시절이라 못 받았어요. 연극으로도 ‘천사여 고향을 돌아보라’로 딱 한 번 탄 게 끝이에요. TV도 TBC 시절에는 받았지만 1980년 언론통폐합 후로는 한 번도 못 받았어요. 그런 의미에서 화려하지 못한 배우죠.”

그는 1970년대 후반 슬럼프를 겪었다. 방송국에서 금품이 오가는 풍토에 회의가 들어 TBC를 그만두려 했다. 그는 “개국 멤버인 우리끼리는 상대 배역을 뺏기 위해 거래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후배들로 내려가면서 그런 현상이 생겼다”며 “한 2, 3년 불이익을 당했다”고 했다. 나이도 50대로 넘어가던 시기라 갱년기 증세까지 겹쳤다. 그는 1982년 KBS 대하드라마 ‘풍운’에서 대원군 역을 맡으면서야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화려하지 않았기에 노력할 수밖에 없었어요. 1970년대에는 신문에서 배우들의 랭킹을 주 단위로 발표했어요. 최불암 수사반장이 항상 상위고 나는 4, 5등, 잘하면 2등이었죠. 영화에서도 신성일 같은 배우가 있었고, 연극도 마찬가지였어요. 어느 한쪽도 내가 정상에 올라선 적이 별로 없어요. 대단히 큰 평가를 받지 못한 게 연기를 계속 추구하는 동인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는 “화려하게 우뚝 서면 거기에 자족해 슬럼프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직종의 함정”이라며 “떴을 때의 기분으로 계속 살면 어느 날 쓰러져 버린다”고 충고했다. 같은 연기로 자기복제를 하다보면 식상해져 버린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그는 60년을 연기했음에도 여전히 새로운 도전과 발견을 추구한다.

“배우란 늘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예요. 2년 전 ‘사랑별곡’과 달리 뭘 새롭게 발견하고 창조할 수 있나 끊임없이 고민해요. 연기란 완성이 있을 수 없어요. 죽을 때까지 한없이 추구하는 거죠.”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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