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만리장성은 흉노 등 북방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인 한족 간 생존을 건 투쟁의 산물이었다. 6352㎞ 길이의 만리장성은 진나라 때부터 14∼17세기 명나라 때까지 지어졌다. 우주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인간구조물이라는 만리장성이 국방의 최후 보루가 되지 못한 건 아이러니다. 진나라는 내란으로 통일 15년 만에 무너졌다. 명나라는 방어가 허술한 곳으로 우회침투한 북방민족의 노략질로 고통받다 청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풍요하고 비옥한 한족 영토는 유목민족의 좋은 약탈 대상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사생결단으로 덤벼드는 유목민족에게 만리장성은 온전한 장벽이 되지 못했다.
1989년 11월9일 동독인들이 길이 164㎞, 높이 3∼4의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동유럽 공산체제 붕괴 도미노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어떤 성공한 체제도 사람들을 가두고 자유를 몰아내는 장벽을 세우지는 않는다. 치욕의 벽이 곧 공산주의 실패의 상징이 될 것이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1963년 1월 국정연설에서 했던 예언이 26년 만에 실현된 것이다.
“동트는 새벽녘 나는 달리고 있어요. 태양이여 부디 나를 들키게 하지 말아다오. 이민국에 신고되지 않게 말이에요. 난 어디로 가야만 하나요. 난 희망을 찾아가고 있어요. 혼자서 외로이, 사막을 헤매며 도망쳐가고 있어요.” 멕시코계 미국인 여성가수 티시 이노호사가 불렀던 노래 ‘돈데 보이(Donde Voy)’의 가사이다. 멕시코 국경을 넘는 불법 이민자의 처절한 삶과 애환이 잘 녹아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엊그제 국경장벽 예산 80억달러(약 9조원)를 확보하기 위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마약과 마약사범을 막기 위해 장벽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속내는 밀입국자의 입국 차단일 것이다. 그의 바람과 달리 국경장벽은 결국 무용지물이 될 듯 하다.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멕시코인들의 열망이 장벽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장벽이 아무리 튼튼해도 넘으려는 자와 무너뜨리려는 자의 강한 의지를 막을 수 없음을 만리장성과 베를린 장벽이 보여주지 않았는가.
김환기 논설위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