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선명한 색으로 가득 찬 계절
유월이다. 여름의 초입에서 유월은 선명한 색으로 가득 찬다. 겨울과 초봄, 갈색이 덮었던 언덕은 잎이 무성한 초록의 모습이다. 시린 기운이 담겼던 퍼런색의 바다도 온기를 머금은 푸른빛을 뿜어낸다. 태양의 기운을 받은 색들은 어느 때보다 밝고 생생하다. 가을이 오면 사라질 생기를 마음껏 즐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더운 날씨에도 산이나 바다로 향하는 이유다.
색은 계절에 따라 변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의 흐름에 맞춰 변해 간다. 식물만 하더라도 그것은 제 몸에 흐르는 수액에 적합한 재료를 섞어 색을 만든다. 수액이 끊임없이 순환하며 색은 머물지 않고 흘러간다. 색은 멈춰진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현상이다. 그렇기에 시각적이라고 단순화하기에는 담고 있는 것이 더 많다. 김미영(35·여)은 색의 ‘더 많은’ 것을 캔버스에 표현하는 화가다.
#김미영이 그리는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회화
김미영은 예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일찍이 탄탄한 기본기를 다졌다. 한국 회화에 대해 전통부터 알고 싶어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회화의 다양한 방식을 탐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먹에서 벗어나 유화물감, 아크릴물감 등 서양화 재료를 다루어 보았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 영국 런던의 왕립예술학교로 유학을 떠나 본격적으로 자기 작품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유학 초기에는 드로잉 작업을 중점적으로 했다. 선과 점으로 형태와 구조를 연구하려는 시도였다. 프랑스 파리국제예술공동체(Cite internationale des arts)에 입주하며 작업은 전환점을 맞는다. 일명 시테(Cite)라 부르는 이곳은 프랑스 정부가 파리의 시테섬에 외국인 작가 육성을 위해 마련한 장소다. 매년 50여개 국가에서 온 작가 1000여명을 선정해 작업실을 제공한다. 김미영은 학교에서 대표로 선발돼 여기에 머무르는 기회를 얻었다.
파리국제예술공동체는 예술가를 위한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파리의 미술관들을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프리 패스’(free pass)를 제공했다. 미술관에 가서 좋아하거나 연구하는 작품은 몇 번이고 다시 봤다. 혼자 작업하는 커다란 방도 줬다. 작업에 조용히 집중하니 붓이 캔버스에 닿는 순간과 유화물감이 남기는 흔적에서 재미가 느껴졌다. 드로잉의 얇은 선이 가득하던 화면은 물감의 두꺼운 선으로 차기 시작했다. 색으로 채우는 추상 화면이 등장했다.
시테에서 나와서도 유화 작업은 이어졌다. 그즈음 작가에게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근교 도시를 방문할 일이 생겼다. 그날따라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며 평소에는 관심 없던 창밖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철조망이 있고 그 너머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이 있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 속에 철조망과 초원이 엇갈리는 착시가 일어났다. 그것들은 중첩된, 하나의 신비로운 이미지가 되어 다가왔다. ‘저렇게 움직이는 회화를 그리고 싶다. 내가 경험한 순간을 화폭에 담고 싶다.’ 이런 생각이 강렬해졌다.
추상회화는 멈춰 있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바넷 뉴먼(1905∼1970)이나 러시아 출신 마크 로스코(1903∼1970) 같은 해외 거장들의 작품이나 한국의 단색화를 떠올려도 좋다. 김미영의 추상회화는 움직인다. 걷거나 달리는 것이 아니라 춤을 춘다. 강약이 살아 있는 붓의 흔적은 율동감을 만든다. 그래서 관객들은 그의 작품 앞에 오래 머문다. 마음속에서 자기만의 춤을 추게 되기 때문이다.
#오롯이 홀로 가꾼 화가의 정원
김미영은 런던의 기차에서처럼 자신이 경험한 것을 그린다. 경험한 것을 작업할 때 그 장면의 사진을 보고 그리는 경우를 종종 봤다. 하지만 김미영은 경험한 것을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끌어내 화면에 풀어낸다. 시각적인 것은 물론이고 후각이나 촉각, 청각 등 다양한 감각의 혼재로 나타난다. 저녁 숲을 거닐 때 양쪽 볼을 스치던 바람, 시린 겨울날 발끝에 치이던 눈의 차가움, 여행지에서 작열하던 태양의 온도와 같은 식이다. 김미영의 캔버스 위에서 물감은 사의(寫意)적인 동양화를 그리듯 심상을 담아낸다.
김미영과 캔버스 사이에는 개입이 없다. 기억을 설명하는 사진도 사람도 없다. 그렇기에 작품의 크기를 정하고, 색을 선택하고, 붓질의 강도를 조절하는 등 모든 과정은 그에게 달려 있다. 오랜 시간 고민하고 정성을 다해 그려낸 소중한 그림은 오롯이 혼자 만들어 낸 세계다. 김미영이 화가의 정원, ‘더 페인터스 가든’(The Painter’s Garden)이란 이름을 작품에 붙인 이유다. 2017년부터 선보이는 가장 잘 알려진 연작이다.
‘더 페인터스 가든’(2018)은 2018년에 그린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볼 때마다 프랑스 지베르니에 위치한 클로드 모네(1840∼1926)의 정원 속 연못이 생각난다. 3만3000㎡(약 1만평)가 넘는 것으로 알려진 이 광대한 정원은 모네에게 평생 영감을 준 장소였다. 모네는 정원 안에서 수련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연못을 특히 좋아했다. 세계의 걸작으로 꼽히는 ‘수련’ 연작을 여기서 그렸다.
‘더 페인터스 가든’(2018)을 채운 연두색은 나무가 비친 연못 같고, 녹색은 그 위에 떠 있는 수련 같다. 사이사이 자리 잡은 분홍색은 그 위에서 피어나는 꽃을 떠올리게 한다. 같은 연작의 다른 작품에 비해 붓 자국이 작은 편이다. 잔잔하게 움직이는 물 위에 간간이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수련과 어울린다. ‘청순한 마음’이란 수련의 꽃말과도 맞아떨어진다.
‘더 페인터스 가든’ 연작 외에 ‘세일링 더 포레스트’(Sailing the Forest·2017)도 주목할 만하다. 작가가 미국 뉴욕주의 레이크 조셉이란 호수에서 배를 타고 바라본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포레스트 버그란 동네에 자리 잡은 이 호수는 찾는 이가 드물어 한가하고 고요하다. 노를 우연히 잘못 저어 배가 회전하며 본 숲의 초록은 환상적이었다.
대형 캔버스에 그린 이 작품은 남다른 붓질의 흔적을 보여 준다. ‘더 페인터스 가든’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 보인다. 작가는 들고 있던 노의 무게를 떠올리며 평소보다 무거운 느낌으로 물감을 칠했다. 마지막에는 커다란 붓에 힘을 실어 그 위를 한 번 더 오갔다. 이를 통해 배에서 경험한 속도와 바람의 느낌을 담았다. 그것은 실제로 보는 이에게 전해진다.
#자유를 주는 물감의 변주
김미영은 ‘웨트 온 웨트’(wet on wet) 기법을 사용한다. 캔버스에 칠한 유화물감이 마르기 전에 다시 물감을 덧칠하는 작업 방식이다. 마르지 않은 물감과 새로 칠한 물감은 자연스럽게 섞이고, 붓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대로 결이 남는다. 일반적으로 유화는 밝은색을 먼저 칠하고 어두운색의 물감을 쌓아 가며 견고한 형태를 만든다. 김미영은 반대의 순서를 선택해 형태를 무너뜨리고 색이 섞이는 현상을 더 도드라지게 한다.
18세기 영국의 시인 겸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는 시 ‘순수의 전조’로 널리 알려졌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이 시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이다. 현실 세계에서 통하지 않을 모순된 단어의 조합으로 가득하다. 그런데도 어색하지 않고 의미를 생성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정해진 질서가 있다. 블레이크의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은 질서로부터 해방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세계다. 김미영의 춤추는 회화가 의미 깊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두운색을 먼저 칠하고 젖은 물감에 덧칠하는 통념에서 벗어난 재료 물성의 변주가 만드는 화면이기 때문이다. 예술 안에서 새로운 시도는 항상 아름답다.
김미영의 회화는 색을 담고 있다. 사진처럼 멈춰 있는 색이 아니라 영화처럼 흘러가는 색을 담고 있다. 햇살이 뜨겁던 여름날 오후, 꽃향기가 바람에 전해지던 저녁에서 경험한 기쁨과 설렘 같은 감정이 보는 이에게도 느껴진다. 그렇기에 ‘더 페인터스 가든’과 ‘세일링 더 포레스트’는 남은 유월에 두고두고 보고 싶은 그림이다. 떠나고 싶은 계절, 떠날 수 없을 때 나의 감각과 감정을 채워 줄 그림들이다.
김한들 큐레이터, 국민대 미술관·박물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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