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가 1965년 수교 이래 최악의 시기에 직면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22일 청와대는 당초 예상을 깨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전격 종료했다. GSOMIA를 연장하는 대신 실질적인 정보공유를 일시 중단하는 등의 절충안이 채택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으나, 청와대는 파기를 선택했다.
이에 따라 일본의 반도체 3개 소재에 대한 수출규제로 촉발된 양국 갈등은 일본이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 안보상 수출 우대국)에서 한국을 제외한데 이어 우리측도 GSOMIA를 종료함으로서 되돌릴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닫게 됐다. 양국간 신뢰 증진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던 제도적 장치들이 하나씩 무력화되면서 외교, 경제적 갈등과 충돌이 안보 분야에서도 재연될 우려도 커지고 있다.
◆한일 관계 ‘마지막 보루’도 사라졌다
1965년 수교 이래 한일 관계는 충돌과 갈등, 화해와 우호 관계의 연속이었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더 낫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 애증의 관계였다.
이같은 한일 관계를 지탱했던 것은 안보 분야였다. 한국과 일본은 북한이라는 공통의 위협에 대처할 필요성을 갖고 있었다.
특히 북한이 1990년대부터 노동1호를 비롯한 사거리 1000㎞ 이상의 준중거리탄도미사일(MRBM)을 발사하면서부터 일본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전력을 안보위협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잠수함을 타고 일본에 상륙, 유엔군사령부 후방기지 등을 타격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북한과 인접한 한국과의 안보협력을 통한 정보공유가 필요해졌다.
한국도 일본의 우수한 정보수집자산에 접근할 기회를 반길 수밖에 없었다.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게 정보”라는 정부 관계자의 말처럼 정보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역사교과서 문제와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으로 한일 관계가 부침을 거듭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2001~2006년)에서도 양국간 안보협력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였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이 고도화되면서 한일 안보협력은 더욱 긴밀해졌다. 그 결과 2016년 GSOMIA가 체결됐다. 이는 2017년 북한의 거듭된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국면에서 북한 핵과 미사일 전력의 실체에 접근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됐다.
하지만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과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이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를 중단하면서 한일 안보협력의 동력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기반한 안보협력은 중요성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12월 발생한 일본 초계기 저공위협비행 사건은 양국 안보협력의 기반이었던 신뢰관계에 큰 상처를 남겼다. 당시 일본은 한국 해군 광개토대왕함이 동해상에서 조난당한 북한 선박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레이더를 가동한 것을 놓고 “자위대 P-1 해상초계기를 겨냥했다”며 한국측을 몰아세웠다. 이후 동해와 남해상에서 작전중이던 한국 해군 함정에 초계기를 저공으로 근접시켜 긴장 국면을 조성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일본이 백색국가 제외 조치를 강행한 것은 양국 안보협력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동력마저 없애는 결과로 이어졌다. 일본이 한국을 신뢰할 수 없는 국가로 인식하는 상황에서 경제와 안보를 분리하는 ‘투 트랙’은 실행하기 어려웠다. 국가의 안전보장에 대한 협력은 상호 신뢰 없이는 불가능하다. GSOMIA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셈이다.
◆‘갈등과 충돌’ 쓰나미 밀려오나
일본 수출규제와 백색국가 제외, 우리측의 GSOMIA 종료 조치로 한일 관계를 증진하는데 필요한 신뢰 구축을 떠받치던 제도적 장치들은 상당부분 무력화되거나 동력이 훼손됐다. 한미일 정보공유 약정(TISA)처럼 미국의 ‘개입’을 의무화하는 장치가 있지만,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신뢰할 수 없는 국가로 평가하는 상황에서 정보공유나 공조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는 양국 간 안보협력과 동북아시아 정세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GSOMIA는 유사시 신속하게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한국과 일본이 북한, 중국, 러시아의 위협에 공동보조를 맞출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이 GSOMIA 연장을 요청했던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1945년 광복 이후 한일 양국이 유일하게 맺은 안보협정이 종료되면 한미일 안보협력은 꼬일 수밖에 없다.
이같은 상황에서 GSOMIA의 종료는 북한과 중국, 러시아의 군사적 움직임을 자극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연장 요청에도 한국이 GSOMIA를 종료한 것은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과 존재감이 축소되고 있다는 의미다. 스티브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청와대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을 만난 지 몇 시간 후에 종료 결정이 발표된 것도 이같은 해석에 힘을 실어준다.
역내에서 힘의 공백이 생기면 이를 대체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진다. 동북아에서 균형자 역할을 했던 미국의 영향력이 예전같지 않게 되면 중국과 러시아, 북한의 군사적 움직임이 활발해진다.
지난해부터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에 폭격기를 들여보낸 중국은 울릉도와 독도 사이 해역까지 진출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러시아도 지난달 A-50 조기경보통제기가 독도 주변 영공을 침범, 한국 공군이 경고사격을 가하기도 했다. 북한도 지난 5월부터 단거리 미사일을 동해상으로 발사하는 상황이다. 이들 국가들이 지금보다 더 적극적인 군사행동에 나선다면, 이를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한국의 부담은 그만큼 커진다. 한반도 정세가 불안정해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한일 간의 군사적 갈등도 배제할 수 없다. GSOMIA가 효력을 발휘하던 시기에도 양국은 일본 초계기 저공비행위협 사건으로 갈등을 겪었다. 일본이 초계기를 한국 해군 함정에 근접시킨 것을 두고 한국 해군의 대양 진출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본이 한국 해군을 한반도 연안에 묶어두려 한다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GSOMIA가 종료되면서 상호 신뢰가 사라진 상황에서 초계기 저공위협비행과 같은 사건이 재발할 가능성은 적지 않다.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 여파는 한일 관계 전반에 미칠 수 있다. 특히 독도방어훈련이 실시되면 일본의 반발 또는 맞대응에 따른 돌발상황이 발생할 우려도 있다. 우발적 충돌 가능성이 높아지는 셈이다.
한미 군사동맹이 양국 관계를 지탱했듯 안보협력은 한일 관계를 떠받쳐온 보루였다. 그리고 그 보루의 기반은 신뢰였다. 양국이 서로를 신뢰할 수 없는 상대라고 인식하는 순간, 한일 관계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한번 무너진 신뢰는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북한은 여전히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지 않았고, 중국과 러시아는 한반도에서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공조를 강화하고 있다.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기 위한 노력을 한일 양국이 기울여야 할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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