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봄은 온다. 매화 피는 계절
‘그래도 봄은 온다.’ 얼마 전 평창의 한 목장 언저리를 산책하며 한 생각이다. 목장의 입구에는 작은 계곡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겨우내 꽝꽝 얼었을 그 표면은 점차 얇아지는 듯했다. 한가운데에는 구멍이 나 물살의 흐름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여전히 시린 느낌이었지만 물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봄이 느껴졌다.
봄이 왔다.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외투는 한 겹 얇아졌다. 남도에서는 홍매화 등 봄꽃이 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가장 일찍 매화를 피운다는 순천 금둔사에서는 꽃이 핀 지 일주일이 지났다. 유독 기온이 높았던 겨울의 영향으로 동백꽃도 평년보다 열흘 일찍 만개했다는 소식이다. 여행은 물론 외출도 꺼리는 최근 분위기에 꽃을 보러 나서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이럴 때는 풍경을 대신하는 그림을 떠올리며 그 아쉬운 마음을 달랜다.
이 계절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은 매화 그림이다. 매화는 고려 시대 이래 시화의 주된 소재로 등장했다. 문인과 학자, 화가들의 애호를 한몸에 받은 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송대 임포의 삶을 동경하며 집 주변을 둘러싼 매화를 그렸기 때문이다.
작년 이맘때쯤 소개한 전기(1825~1854)의 매화 그림이 이러한 작품 중 하나다. 그리고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로 전기의 그림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조희룡(1789~1866)의 작품이다.
#근대적 시각의 조선 예술가, 조희룡
조희룡은 조선 후기와 말기에 활동한 문인이자 화가다. 조선 개국공신인 조준의 15대손이며 벼슬에 오르기도 했다. 조선 사회의 근간이었던 신분제가 동요하고 청의 학문과 문물이 유입되는 과도기에 살았다. 전에 없던 움직임 속에 그는 사대부 가문 출신이지만 신분이 낮은 중인 계층이라는 이중성을 지녔다. 울분이 쌓이는 경험도 많이 했지만 여향시사인 벽오사의 중심인물로 예술적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시사는 시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시를 읊는 장소 또는 그 모임 자체를 일컫는다.
김정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의 예술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 영향으로 청장년 시절에는 전통적인 문인들의 미의식을 그림에 적용하였다. 예송 논쟁에서 김정희가 탄핵당했을 때는 그의 복심으로 지목되어 덩달아 유배를 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김정희의 작품세계를 답습하기보다는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창출하는 데 집중했다. 이렇게 그림의 독창성을 중요시하고 예술가로 자부심을 가졌기에 그를 근대적 시각의 전문 예술가로 부르기도 한다.
김정희는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를 추구했는데 조희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자향 서권기는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 즉 학문적 수양의 결과로 고결한 품격이 담기는 것을 뜻한다. 대신 ‘수예론(手藝論)’을 주장하며 그림은 빼어난 실력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자서전적 성격의 ‘석우망명록’에서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글씨와 그림은 모두 수예에 속하여 재주가 없으면 비록 총명한 사람이 몸이 다하도록 배워도 할 수 없으니, 그림은 손끝에 달려 있는 것이지 가슴속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들은 이를 반영해 조선 시대 그림 일반에 비해 화려한 맛을 가진다. 뛰어난 그림 실력을 잘 드러내기 위한 전략적 작업 방식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는 사군자와 괴석 그림에 특히 능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파격적인 매화 그림으로 당대를 풍미하기도 했다. 유교적 가치관의 상징물이었던 대상의 회화적 상상력을 증폭하는 매력이 있는 그림들이다.
#조희룡이 만든 매화로 가득 찬 세계
조희룡의 유작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매화 그림이다. 그의 이러한 매화 사랑은 여러 기록에서 드러나 요즘 말하는 높은 ‘덕후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살아생전 매화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호를 매수(梅?)라고 지으며 자신의 거처 역시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고 불렀다. 그 안에 매화 병풍을 펼쳐 두고 그 앞에 앉아서는 매화를 읊은 시가 새겨진 벼루와 먹을 사용했다. 때로는 그 시를 소리 내어 부르다 목이 아프면 매화차를 마시며 달랬을 정도다.
그의 매화 그림 가운데 특히 뛰어나다고 손꼽히는 작품들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조선 19세기)도 그중 하나다.
임포의 고사를 떠올리며 그렸을 세로 형태의 화면 위에 깊은 산속 초가가 자리 잡은 모습이다. 향설해(香雪海), 즉 ‘매화 향기와 눈 같은 꽃이 바다와 같다’는 광경이 그대로 펼쳐져 있다. 눈처럼 흩날리는 매화의 표현은 조희룡의 예술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초가 안에는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팔을 서로에게 내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세히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매화차를 주고받는 장면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마주 앉아 이야기와 차의 향을 같이 나누고 있는 순간. 어쩌면 임포를 떠올리며 그렸다기보다 매화백영루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홍백매화도(紅白梅花圖)’(조선 19세기)는 조희룡의 또 다른 독보적 매화 작품이다. 매화 한두 그루를 여러 폭 병풍에 펼쳐 전수식으로 그렸다. 매화나무 그 자체를 묘사해내는 데 애쓴 화면에는 두 그루가 넓게 펼쳐져 있다. 두꺼운 줄기가 구불거리며 올라가는 모양새가 용이 승천을 위해 꿈틀거리는 것 같다. 그는 이렇게 기굴한 매화를 그리는 것을 ‘장육존상’에 비유하여 ‘장육매화’라고 불렀다.
그것을 중심으로 줄기가 넓게 펼쳐지고 흰 꽃송이와 붉은 꽃송이가 만발한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화면은 다채로우면서도 휘황한 분위기를 풍겨낸다. 간결함과 절제가 미덕이었던 매화 그림은 여기서 전에 없던 형태의 모습을 가진다. 화려하고 섬세하고 풍요로운 양식의 매화 그림으로 우리 앞에 등장한 것이다.
#새로운 계절의 앞에 서서 변화를 꿈꾸는 일
조선 시대에 예술적 취향과 예술가로서의 고뇌를 밝힌 경우는 드물다. 특히 시류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자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이는 조희룡이 처음일 것 같다.
그는 살아생전 파격적인 작품과 더불어 다수의 문집으로 이러한 주장을 펼쳤다. 자기의 예술적인 재능, 이를 저해하는 사회와의 갈등, 그리고 기존의 보수적인 가치관과 다른 예술관을 밝혔다. 이는 현인이 모든 문제에 해답을 알던 과거와 달리 누구 한 명이 다 대답할 수 없는 전문화된 지금과 이어지는 듯도 하다.
그래도 봄이 왔고 계절이 바뀌었다. 때로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데 주저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변화는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럴 때 계절의 변화는 용기를 내기 위한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준다. 개인적으로 학문적 수양의 품격이 품기는 작품이 더 잘 마음을 주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에 조희룡의 작품이 떠오르는 것을 보니 커다란 변화에 용기를 낼 시기가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큐레이터, 국민대학교 미술관·박물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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