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잔클로드가 먼저 생을 마감하고 10여년이 지난 뒤다. 뉴욕 자택에 머물다 노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최근까지도 증강현실로 작품을 실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작가의 공식 웹사이트에는 ‘진행 중인 작업(Works In Progress)’ 카테고리가 여전히 있다. 84세의 짧지 않은 시간을 살다 갔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이유다.
◆크리스토와 잔클로드의 대지 미술
크리스토 블라디미로프자바체프(Christo VladimirovJavacheff, 1935~2020)와 잔클로드(Jeanne-Claude, 1935~2009)의 이름은 항상 붙어 다녔다. 부부인 이들은 ‘크리스토와 잔클로드’라고 불리는 예술적 동지이자 공동체로 평생을 살았다. 1935년 6월 13일 같은 날 태어난 두 사람에게는 평생을 함께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듯하다. 우연을 거쳐야 인연일 수 있듯이 탄생부터 연결 고리가 있었다.
불가리아에서 태어난 크리스토는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소피아 미술아카데미에 진학했고 곧 프라하와 빈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 과정에서 회화는 물론 무대 미술까지 다양한 범주의 예술을 배웠다. 그다음 목적지로 파리를 정한 것은 유럽 미술의 중심지에서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파리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잔클로드를 만났다. 미술에 관심이 있던 잔클로드와는 이야기가 잘 통했다. 부부가 되었고 작품 활동을 함께 펼치기 시작했다. 크리스토가 작품을 구상하면 잔클로드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 방법을 찾는 식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한 작업 방식은 ‘포장(Wrapping)’이었다. 크리스토는 불가리아의 사회주의 속에서 미술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공인된 사회주의 리얼리즘 표현 방식을 사용하여 농업이나 공업장의 풍경을 영웅적으로 그려야 했다. 때로는 정부 주도하의 예술 프로젝트에 동원당하기도 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경험은 서쪽으로 가는 유럽 횡단열차 철도 옆 단장 사업이었다. 정부는 미술 전공자에게 지평선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배치를 연구하도록 했다. 더불어 더러운 것들이 보이지 않게 잘 포장하는 방법을 고안하도록 요구했다. 사회주의의 어려운 경제 현실을 서방 국가에 은폐하기 위해서였다.
사회주의에서 은폐를 위해 사용하는 ‘포장’이라는 방법은 크리스토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후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중요한 조형 언어가 되어 파리에서 드러났다. 두 사람은 병, 의자 등의 오브제를 포장하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공공장소와 건물을 포장하는 것으로 작업의 규모를 확대했다. 앞서 언급한 잔클로드의 현실적 방법은 이 대형 프로젝트를 위한 작업 비용 구상 및 마련, 공공기관과의 협력 및 행정이다. 막대한 자금과 대규모의 협상은 작업을 조직하는 데만 보통 몇 년을 소요하게 했다. 하지만 “우리의 예술은 오직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위한 것일 뿐”이라는 이 부부의 열정은 수많은 작품을 실현시켰다. 대지 미술이라 부르는 거대한 미술의 영역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겼다.
◆다수의 경험을 위한 커다란 포장
대지 미술은 거대한 장소와 규모를 활용하는 미술을 말한다. 다양한 형태만큼 다양한 특징이 있지만 크리스토와 잔클로드의 미술에서 눈에 띄는 것은 관람객 참여다. 이들의 작품은 관람자에게 전통적인 미술작품과 다른 작품 감상 방법을 제안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갤러리나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회화, 조각 등을 눈으로 감상한다. 눈이 작품의 형태를 피동적으로 파악하고 거기서 나타나는 예술성을 느낀다. 크리스토와 잔클로드의 작품은 시각을 넘어선 신체적 참여를 감상 방법으로 제안한다. 관람자들은 작품의 배경인 대지 위를 걸으며 바람의 소리를 듣고, 작품을 만져보는 등의 경험을 한다. 관람자가 방문할 수 없는 장소의 작품은 제작 과정을 기록한 하나의 다큐멘터리로 감상할 수 있다.
두 사람을 세계적인 예술가의 자리에 올려놓은 대표 작품은 ‘포장된 라이히슈타크(WrappedReichstag)’(1971~1995)다. 이 작품은 베를린의 제국의회 의사당을 포장한 작업이다. 부부는 이 프로젝트를 1971년 독일 국회에 처음 제안했다. 하지만 여러 번의 거절을 받고 다른 작품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1990년에 들어 662명의 국회의원에게 개별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설득을 통해 프로젝트의 허가 여부가 국회 회의 안건으로 채택되었다. 1995년 2월 25일 마침내 프로젝트 허가가 나왔다.
제국의회 의사당은 곧 두 사람의 감독하에 포장되기 시작했다. 전문 인력이 알루미늄판으로 건물 형태를 잡은 뒤, 10만㎡에 이르는 내화 폴리프로필렌으로 둘러쌌다. 이후 15km의 밧줄을 사용하여 내화 폴리프로필렌을 고정했다. 7월 7일 철수를 완료할 때까지 50만명의 방문자가 이 장관을 목격했다.
제국의회 의사당은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건물이다. 여기서 바이마르 헌법이 가결되었고 히틀러가 수상에 올랐다. 시각뿐만 아니라 사회학적으로도 거대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건물을 천으로 덮은 모습은 사람들에게 실제보다 더 큰 크기를 느끼게끔 만들었다. 사람은 이처럼 거대한 것을 마주하면 그로 말미암아 하나의 감동적인 만족 상태에 이른다. 즉, 이들의 작품에서 감상자는 거대성을 통해 미학적 만족, 즉 숭고미를 느낀다.
◆소유물이 아닌 존재로서의 미술
크리스토와 잔클로드는 2005년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아무도 내 작품을 소유하지 못한다. 관객도 소유하지 못하고 나와 크리스토도 소유하지 못한다. 어떤 누구도 이것을 이용하여 돈을 만들지 못한다. 표를 팔 수도 없고 작품을 팔 수도 없다.” 이들의 작품은 일정 기간만 전시한 뒤 철수되었고 기록으로만 남았다. 그 기간 관람자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경험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이 특별한 경험은 아무도 소유할 수 없지만, 모두가 소유할 수 있는 기억으로 남는다.
이러한 탈소유를 위해 부부는 평생을 바쁘게 살았다. 직접 제작한 드로잉, 콜라주, 입체 모형 등을 팔아 제작비를 마련했다. 기업이나 정부의 후원금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 어떤 권력이나 이데올로기에 종속당하지 않고 순수한 의도를 지키고자 했다. 소유물이 아닌 존재로서의 미술을 구현하는 미술가를 또 언제 만나볼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본래의 목적과 취지에서 이탈하는 자들이 가득해지는 세상에서, 생각이 많아진다. 두 사람의 순수한 열정은 투명해서 바라지 않고 오래 남을 것이다.
김한들 큐레이터 / 국민대학교 미술관박물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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