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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으면 금세 실력 는다”… 어릴 때부터 체벌 당연하게 인식 ['체육계 폭력' 악습 끊자]

, ‘체육계 폭력’ 악습 끊자

입력 : 2020-07-10 06:00:00 수정 : 2020-08-05 16: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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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성적지상주의 떠받치는 복종문화 / 초중고 선수 34% 신체가해 등 폭력 경험 / 대학생 73% 경험… 나이 들수록 더 맞아 / ‘사랑의 매’ 도그마에 부모도 체벌 모른척 / 뿌리깊은 유교·군대문화로 복종 내면화 / ‘국가대표 훈련지침’도 지시 복종 명문화 / 지도자는 선수 생사여탈권 쥔 ‘갑 중의 갑’ / 감독에 찍히면 미래 없어… 웬만하면 감내 / 철저한 을이 된 선수, 금품 갈취 당하기도
성적을 위해 어린 수영선수를 체벌하는 내용이 담긴 영화 ‘4등’의 한 장면. 세계일보 자료사진

학교나 실업이 운동부를 운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누가 뭐래도 성적이다. 자선사업이 아닌 다음에야 만년 꼴찌팀을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운영해야 할 이유는 없다. 또한 운동부를 이끄는 지도자 역시 성적을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일자리를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 당연히 성적이 모든 것의 기준이자 최우선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 스포츠를 갉아먹는 해충이 되어 자라고 있었다. 성적지상주의가 체육계에 폭력이 자연스럽게 똬리를 트는 환경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맞으면 금세 실력이 는다”면서 많은 지도자가 짧은 시간에 좋은 성적을 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체벌을 떠올린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유도 대표팀의 한 코치는 외국인 선수와 관계자가 빈번하게 오가는 공개된 장소에서 대표선수에게 심한 훈육을 하다 자원봉사자로부터 신고를 당해 국제 망신을 사기도 했다. 그만큼 지도자에게 체벌은 거리낌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선배들이 규율을 내세워 가세하는 것도 흔한 일이다. 지금은 프로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한 구기 종목 선수는 “격투기도 아닌데 성적은 ‘맷집에 비례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나이 들수록 더 맞는다…성인 31%가 맞으며 운동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해도 운동선수를 향한 지도자들의 만연한 폭력은 현실이다. 2019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초중고 선수 5만7557명 중 34.2%인 1만9687명이 언어폭력이나 신체적 가해, 그리고 성폭력의 피해를 봤다고 응답했다. 이 가운데 신체폭력의 경우 8440명으로 전체의 14.7%였고 성폭력도 3.8%(2212명)를 차지했다. 초등학생에게는 언어폭력이 19%로 가장 많았지만 중고등학생은 신체폭력이 각각 15.0%와 16.1%로 세 가지 폭력 유형 중 가장 많았다. 즉 나이가 들수록 신체에 가하는 직접적인 폭력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성인이 됐을 때 더욱 늘어나는 폭력 노출 양상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같은 해 12월 인권위가 대학생과 실업팀 선수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폭력을 당했다는 응답 비율이 훨씬 커진다. 대학생 선수 응답자 4924명 중 언어와 신체, 그리고 성폭력을 경험했다고 답한 이는 전체의 73%에 달하는 3600명이었다. 실업팀에서도 응답자 1251명 중 64.2%(802명)가 같은 응답을 했다. 신체폭력으로 그 범위를 축소한다고만 해도 성인 선수의 31.4%가 맞으며 운동하고 있다고 답한 것이 한국 체육계의 현실이다.

◆성적을 위한 복종의 내면화

“미워서 맞는 것이 아니니깐 맞아도 괜찮아요. 아니 그냥 운동하면서 맞는 거는 당연하다고 생각해요.”(초등, 남자, 배구) “코치님에게 맞는 이유는 제대로 하지 않아서 맞는 것이기 때문에 맞는 건 상관없다.”(초등4, 여자, 태권도) “엄마는 제가 수영하는 걸 보러 오시고, 제가 맞는 것도 보시거든요. 엄마는 운동할 때 똑바로 잘하지 왜 맞았냐고, 다음부터는 똑바로 잘하라고….”(초등, 남자, 수영)

이는 국가인권위원회가 학생 선수 폭력 실태를 조사하면서 면담했던 이들의 답면이다. 이를 보면 운동부에 있으면 맞는 것은 당연하다는 인식이 어릴 때부터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부모도 체벌을 정당화하는 데 일조하기까지 한다. 성적을 내기 위한 ‘사랑의 매’라는 도그마에 매몰돼 잘못된 문화를 정당화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는 한국 체육계에 뿌리 깊게 내려앉은 ‘복종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일부에서는 한국 사회의 유교문화 전통 때문이라고도 말하지만 그보다는 군대의 상명하복 문화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런 복종의 강요는 한국 스포츠에서 헌법처럼 여겨지는 ‘국가대표 훈련지침’에도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지침 제8조(임무) 10항을 보면 “국가대표 선수의 임무가 지도자의 지시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명시돼 있다. 2018년 이후 일련의 체육계 폭력과 미투 사건이 벌어진 이후 여러 시민단체 등에서 지시와 명령이라는 단어 앞에 ‘합리적’이라는 단어 하나라도 추가해야 선수들의 거부 자율권이 보장될 수 있다며 변경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여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다.

이렇게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국가대표라 할지라도 지도자의 지시는 하늘이 내린 명령이나 다름없기에 선수들은 군말 없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 명문화돼 있는 상황인데, 이들보다 못한 일선 선수들이 지도자를 대하는 태도가 어떠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어려서부터 어떤 저항도 불가능하도록 복종은 내면화되면서 폭력의 행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운동선수들의 상황이다.

 

고(故) 최숙현 선수 사망 사건과 관련해 지난 6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대한철인3종협회 스포츠공정위원회에서 소명을 마치고 나오는 김규봉 경주시청팀 감독. 연합뉴스

◆생사여탈권 쥔 지도자와 선수는 갑을관계

한국 스포츠계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지도자가 선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완전한 ‘갑을관계’ 형성이다. 성적 위주의 엘리트 체육 시스템으로 성장해 온 탓에 선수들은 학생 시절부터 학습권을 보장받지 못한 채 평생 운동에만 매달려 왔다. 지금은 달라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현장에서는 운동할 시간도 없는데 굳이 수업을 들어야 하느냐는 반발의 목소리가 크고, 편법으로 운동에만 매달리는 선수들도 있다.

특히 고교생이 된 후, 운동 외에는 자신의 진로가 없다고 생각하는 선수들이 많다. 이들에게 지도자는 진학이나 취업을 위한 동아줄이다. 이런 상황에서 감독 눈 밖에 나면 자신의 미래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싹트고, 이는 선수들이 웬만한 폭력을 견디게 한다. 철저한 을이 된 선수들은 폭력뿐 아니라 때로는 금품 갈취까지도 당하기 일쑤다.

이번 고 최숙현 선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감독뿐 아니라 주장과 팀 닥터까지 확대됐다는 점에서 그의 괴로움은 더 컸을 것이다. 갑을관계와 어려서부터 내면화된 복종문화가 어우러지면서 대부분의 선수는 좀처럼 폭력에 저항하지 못한다. 그래도 최 선수는 용기를 냈지만 주변, 특히 상황을 가장 잘 아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기 어려웠다. 최 선수를 돕다가는 왕따나 이단아 취급을 받거나 아니면 아예 체육계를 떠날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평생을 투자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버려지지 않으려면 맞아도 버텨야 한다.

 

송용준 기자 eidy01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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