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의 삶이란 모든 것이 투명하게 보이고 모든 것이 실체적이고 리얼하고 피 튀기는 삶 같은 것입니다. 이제, 그것이 질렸어요. 광장에 있는 것 같은 삶을 더 이상 살지 말고, 조금 더 은밀한 내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잘 발효되고 익으면 소설을 쓰려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오랫동안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작가 박범신(75)은 자신의 두 번째 시집 『구시렁구시렁 일흔』(창이 있는 작가의 집)에 담긴 시 가운데 몇 대목을 설명하다가 “이제 광장의 작가를 졸업하겠다는 선언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툭 던지듯이.
그에게 해설을 부탁한 대목은 “잠이 영 오지 않는 밤엔/ 잠든 그대에게 편지를 쓴다/ 물 위에 쓰는 편지는/ 후회가 없다// 나는 요즘 물 위에 소설을 쓴다”(「불면」 전문)와 “나/ 살아/ 관/ 속에 있네// 관 속에서/ 면도날 틈으로/ 남몰래 내다보네// 저 순정어린 아수라 불빛”(「고백」 전문)이라는 부문.
“비애의 안경을 쓰고 본 것입니다. 최근 몇 년은 소설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소설을 쓰지 못한 슬픔을 묘사한 것이죠. 물에다 쓰는 소설은 책도 나오고 않고 저 혼자만 압니다.”
문단 구력 48년의 박범신은 데뷔 초기를 제외하고 1970년대 후반부터 대중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온 ‘광장의 작가’였다. 열렬하게 글을 쓰고, 열렬하게 책을 내고, 책이 나온 후에는 인터뷰하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 나와 작가와의 대화를 했다. 그렇게 40년 가까이 무대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살아온 그였다.
업계 안팎에선 ‘청년작가’로 불려 왔고, 그 또한 이 말이 싫지 않았다. “감수성이 늙지 않았다는 칭찬으로도 들리고, 한편으론 현역 작가로 시종하고 싶은 그의 꿈과 부합하는 말”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나이의 권위에 구애받지 않고 현역작가로 죽고 싶은 강렬한 꿈과 청년작가라는 별칭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기쁘게 받아들인 그였다.
『구시렁구시렁 일흔』이라니. 세월의 이미지가 선연한 이 시집 제목을 정하는 건 그래서 쉽지 않았다. 출판사 대표와 두 차례나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어렵게 합의했다. “그런데요, 선생님.” 식사가 다 끝나고 찻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출판사 대표가 다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계속 청년작가라고 불려 오셨는데 구시렁구시렁 일흔, 괜찮을까요.” 청년작가라는 이미지가 퇴색될까 걱정해서 묻는 말이었다. 그가 답했다. “청년작가, 그거 하기 힘들어!”
소설가로 익숙했던 박범신이 인간의 희(喜)·노(怒)·애(哀)·락(樂)·애(愛)·오(惡)·욕(欲)이 베인 시 140여 편을 묶은 시집을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나 “본래 ‘시인’인 나를 지금이라도 부디 ‘시인’으로 너그럽게 받아주세요”라고 조용히 요청하고 있었다. 왜 시인으로 돌아왔을까. 그를 지난 15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부근 커피숍에서 만났다.
―시집 구성이 독특하다. 7가지 감정을 담은 시에 산문시, 단편 소설까지 담겼는데.
“시들은 희·노·애·락·애·오·욕 7정으로 묶어 담았고, 「그 너머」는 시라고 해야 할지 산문으로 할지 애매하다. 반쯤은 산문시이고 반쯤은 일종의 우화인데, 우화라고 해도 시적인 어프로치가 있어 긴 시라고 해도 된다. 마지막엔 내가 평생 소설가로 살았으니, 난 역시 작가예요, 라고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독자에게 말하고 싶어 넣은 것이다. 평생 작가로서 유지시키고 썩지 않고 망가지지 않게 유지하게 한 근원은 나의 독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부패한 삶으로 쓰러지지 않게 한 독자들에게 손 편지를 써서 감사를 표시하고 싶었다. 독자에 대한 나의 선물, 서비스 같은 것이다.”
―표제시 「구시렁구시렁 일흔」(전문은 “밤늦게 늙은 아내와/ 마주 앉아/ 생막걸리 나누어 마시면서/ 구시렁구시렁/ 낮의 일로 또 싸운다// 삶의 어여쁜 새 에너지/ 구시렁구시렁에서 얻는다”)을 읽으면 ‘버럭’하던 청년작가에서 ‘구시렁구시렁’하는 노인으로 변화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나이 먹는 것도, 나쁜 것이 더 많지만, 꼭 나쁜 것만 아닌 것 같다. 버럭 하고 소리 지르고 싸우는 것이 나는 청년인 줄 알았다. 요즘 청년들은 버럭 소리를 지르지 않더라. 타인에 대한 마음 속 깊은 배려심을 배운다. 우리는 가부장제 시대를 살았다. 남자로서 부부 싸움할 때 버럭 소리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지금은 나이에 합당한 정도로 변화했다. 그 변화야말로 나의 새로운 에너지라는 얘기다. (완전히 구시렁구시렁하는 사람으로 변한 것인가) 지금은 화가 나도, 상대편의 주장이 있기 때문에, 내 주장을 강렬하게 하지 않는다. 소리를 질러 내 주장을 관철하려는 태도에서 이젠 내 주장을 내려놓고 상대편의 주장을 귀 기울이려는 태도로 변화하고 있다.”
―무엇이 ‘청년작가’에서 ‘구시렁구시렁’거리는 노인 작가로 이끈 것인가.
“뜨거운 현역 작가로 사는 것이 꿈이고 좋은 줄 알았는데, 지금은 더 깊어지는 깊은 작가라는 말을 듣고 싶다는 방향으로 지향이 바뀌었다. 내 자신이 나이 먹는구나, 라고 느꼈다. 더 깊고 더 곰삭은 향기, 이런 것들을 내 안에서 스스로 요구하는 것으로 변모했다. 이제 청년 작가가 아니라 더 깊어지는 향기로운 작가가 되고 싶다.(오래 전 황석영 선생의 ‘만년문학’ 선언이 생각난다) 석영이 형은 나를 만나면 문학청년 같은 캐릭터나 지향을 두고, 너는 문예반 좀 그만하라,고 말하곤 했다. 최근 석영이형 인터뷰한 기사(‘만년문학’ 황석영 “물을 떠먹을 순 있는데 저수지가 없다더라” [김용출의 문학삼매경])를 보니, 열렬하게 쓰다가 죽겠다는 형이말로 문학청년이고 청년작가이던데(웃음). 나도 그런 태도를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문학을 더 깊은 곳으로 가꿔가고 싶은 마음이다.”
―시 「오늘」을 보면 “2018년 정월 초이튿날/...오늘은 청년작가 그를/ 온전히 바다 끝으로 보내고/ 어머니, 저 여기 돌아와 누워 있어요”라고 했는데, 그때부터인가.
“2018년 그날은 내가 중고등학교에 살았던 강경의 작은 아파트를 얻어 이사한 날이었다. 일종의 유명 작가로서 혜택을 입을 논산의 집필실을 떠나서 강경으로 돌아와 저 열렬한 청년작가는 떠나보내고 아름다고 깊은 작가로 살고 싶어요, 라는 소망을 담아서 쓴 시다.”
―산문시 「꿈」을 보면 “산문의 세계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 비애의 안경 너머를 기록했다”며 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독자들은 소설을 편하게 읽을 수 있지만, 작가 입장에선 모든 이야기가 인과적 논리를 확보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소설은 자연과학 이상으로 엄격한 것이다. 작가는 이데올로기나 세계관을 훼손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로 독자를 끌고가 설득시키고 싶은 욕망으로 쓴다. 심지어 아름다운 사랑의 장면조차 어떤 이야기의 구조 안에 인과적으로 담아 독자들을 완벽하게 설득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고통받는다. 박범신이라는 작가는 감수성은 예민하되 그것을 담아내는 논리적인 뇌구조에선 취약한 것 같더라. 공간과 감각 중심의 우뇌는 발달했지만 시간과 이성의 좌뇌는 발달하지 않는 것 같다. 작가는 논리와 감성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하는데, 나는 평생 균형 잡는 게 힘들었다.(그래서 시인으로 돌아온 건가) 시들은 논리를 벗어나 있다. 나는 평생 시인으로 살고 싶었는데, 되돌아보니 산문의 세계에서 논리와 사실적인 실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에 힘들고 고통스런 삶이었다. 그 소망을 이번 시들을 통해 풀었다고 할 수 있다. 시를 쓸 때 보다 더 자유로워졌다고 할까. 그런 의미에서 시인으로 사는 내가 소설가로 사는 나보다 더 행복하다고 할까. 그런 내용을 맨 마지막에 담은 것이다.”
―신이 준 ‘연장통’을 모르고 산다는 「내 연장통」 이야기는 작가와 우리 모두의 얘기도 되는 것 같다.
“신이 나에게 본질적으로 준 연장통이 있고, 내가 갖고 있는 연장통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신이 뭘 줬는지 모르고 산다. 내 연장통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 내 연장통이 아니라 세상이 준 연장통이다. 지금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심어준 가치관이 세계관인 것처럼. 요즘 사람들이 경기도 시흥지구에서 투기하려고 땅을 사는 것도 자본주의 세계가 들려준 연장통으로 세계로 살려는 것 아닌가. 세계가 우리에게 들려준 연장통에 조정되고 눌려서 살면 안되겠다, 뭔가 의미를 발견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얘기다.”
1946년 전북 익산군 황화면(현재 논산시 연무읍)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작가 박범신은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殘骸)」가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어떻게 문학의 세계에 들어온 것인가.
“나는 외아들로, 누나만 네 분 계셨다. 아버지는 읍내에서 포목 장사를 하느라고 집을 비웠고, 어머니는 예민한(sensitive) 분이었는데 누나들과 자주 불화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의 부재 때문에 생긴 일인 것 같더라. 어렸을 때, 어머니와 누나들간 불화 때문에 세상은 불화에 가득 쌓여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어린 나를 세계와 어떤 소통도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고독하게 만들었다. 세계가 미쳐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정상인 것 같고, 세계가 정상이라고 하면 나만 미쳐 있는 것 같은. 세계와 나 사이에 불화가 가득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사실 고교 시절 자살 미수를 두 번이나 했다. 세계와 나 사이의 소통 불능의 절망감, 그런 고독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 같다. 너무 비대하게 책을 많이 읽어, 자기 죽음을 결정하는 것을 통한 퍼펙트한 자유의 획득, 같은 이상한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적인 청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격렬한 내적 갈등과 번뇌는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고, 예민한 나는 세계의 그림자가 비칠 때마다 상처받기 마련이었으며, 그런 상처를 넘어서고 싶은 욕망 같은 것도 가득 안게 된다. 그런 것이 결국 글로 이끌었다. 글은 소통이 불가능한 세계와 나 사이의 다리 같은 것, 소통을 놓는 길,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길이었다. 이미 대학을 갈 때쯤 됐을 때에는 글쓰기에 심취한 상태였다. 하지만 문학을 정식으로 배워본 바 없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가 4, 5번 떨어진 뒤 1973년 등단할 수 있었다. 당시 강렬한 사회 비판 메시지, 육화되지 않는 메시지가 들어 있는 소설을 쓸 때였는데, 아내가 무주에서 썼던 탐미적인 소설 「여름의 잔해」를 고쳐 내보라고 하더라. 마감 3일 전에 고쳐 썼는데 됐더라.”
―시 「오래전 강경역에서」나 「청춘」 등에선 강경역이 자주 나오는데.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강경에서 익산으로 기차 통학을 했다. 그래서 강경역은 외부로 나가는 출구의 초입이자 귀로의 초입이었다. 매일 기차로 타고 도시로 나가 학교를 갔다가 저녁에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곳이 강경역이다. 강경역과 금강 주변은 내 문학의 자궁이라고 할 수 있다.(그때 장주네의 『도둑일기』를 읽거나 비대하게 독서를 했나) 아침에 갈 때 장 주네의 책을 옆구리를 끼고 읽곤 했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가라고 받은 돈으로 잡지 「사상계」를 구독하기 위해 친척집에 숨어 있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자살 미수를 2번 하자 학교에선 ‘폭탄’ 취급했고, 난 공부는 않고 철학책부터 사회비판 서적까지 거의 매일 한 권씩 읽었다. 사실 준비 안된 독서는 한쪽으로 과도하게 치우치면 위험해진다. 세계와 나 사이의 내적 분열에 사로잡혀 절망적이고 염세적인 세계관, 실존이 주는 염세적 세계관만 들어오더라.”
등단 이후 사회비판적인 소설을 썼던 그는 1979년 첫 장편 『죽음보다 깊은 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단숨에 인기 작가로 부상했다. 1993년까지 최인호, 한수산 등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 시기 펴낸 『불의 나라』, 『풀잎처럼 눕다』 등 많은 작품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됐다. 작품들은 대체로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즉발적으로 보여주는 세태 소설”이었다.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던 1993년, 그는 “상상력의 불이 꺼졌다”며 『문화일보』의 『외등』 연재를 중단하고 돌연 절필을 선언했다.
―왜 절필을 선언했는가.
“죽어라고 인기 있는 소설을 계속 쓰다 보니 상상력의 우물이 마르는 느낌이었고, 내가 꿈꾸던 작가의 포지션이 아니라 대중들이 바라보는 무대 위에 있는 것 같더라. 굉장히 절망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등 시대 상황도 스트레스를 줬다. 강력한 민주화 과정에서 과연 내가 작가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한 자의식도 억압하고 있었다. 여기에 내적 갈등까지 겹쳐 언제 소설 쓴다는 계획도 없이 연재를 끊어버렸다.”
그는 절필 이후 경기도 용인의 외딴 산속에서 혼자 살았다. 아이들은 아내에게 맡겨놓고 사회적인 활동을 전면 중단했다. 언제 다시 글을 쓴다는 보장도 없이 3년을 조그만 텃밭에서 수도승처럼 살았다. 어느 날, 밭농사를 하다가 ‘그는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는 식으로 소설을 중얼거리는 자신을 봤다. 이때 “우물에서 넘치듯이 쓰고 싶은 것이 가득 차고 있구나, 물이 넘치면 쓰지 않는 것이 쓰는 것보다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이제 써야겠네”라고 생각하고 문단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쓴 것이 1996년 중편 「흰 소가 끄는 수레」였다. 이후 장편 『나마스테』, 『더러운 책상』, 『당신』, 갈망의 3부작으로 불리는 『은교』와 『촐라체』, 『고산자』 등을 써냈다. 이 시기 수많은 문학상도 받았다.
―‘갈망기 문학’이라고 하는데, 조금 설명해달라.
“이전처럼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았지만, 갈망기의 소설들은 전에 비해 인간 영혼의 본원적인 문제들에 대해 반응한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근본적인 존재론적인 문제, 이를테면 사람들은 영화 때문에 연예소설이라고 착각하지만, 『은교』 같은 소설은 존재론적인 소설이다. 어떻게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이 고통스러운가에 대해 치열하게 질문하는 소설이다.”
그는 2012년 이후 자본주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장편 『소금』, 『비즈니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3편을 써냈다.
하지만 2016년 10월 성추행 의혹이 제기됐고 피해자로 지목된 이들 중 일부는 피해를 받지 않았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커졌고, 그는 성격이나 진위 논란과 상관없이 “내 일로 인해 상처받은 모든 분께 사과하고 싶다”며 사과한 뒤 활동을 중단했다.
교대 출신으로 6년간 중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한 그는 1995년부터 2011년까지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상명대 석좌교수로도 잠시 근무했다. 한국방송공사(KBS) 이사장과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교직이나 사회 활동 등은 어땠는가.
“젊어서부터 가르치는 일 자체를 글쓰기와 함께 소명으로 생각했다. 명지대로 오라고 해서 20년 넘게 있었고, 내가 길러냈다고 할 순 없지만, 수십 명의 작가가 나왔다. 2,3년간 상명대 석좌교수로 있다가 소설만 쓰려고 그만뒀다. 사회활동으로 KBS 이사장과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을 했는데, 하는 일도 없고 돈도 많지 않았지만, 회의에 나가 훈수하는 역할을 했다. 사실 내 입장에선 귀찮고 월급 받는 자리도 아니지만 유명작가로서 문학에 좀 기여할 수 없겠느냐, 후배 작가들이나 문학예술인을 위해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해 하게 됐다.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을 할 때 연희문학창작촌 지원을 시작했고, KBS 이사장 시절엔 「TV 책을 말하다」 등 독서 프로그램을 많이 생기도록 한 게 보람이 있었다.”
―앞으로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작가도 여러 유형이 있는데, 나는 지사적인 작가도, 권위 있는 작가도 되고 싶지 않다. 대신 소설가이면서 예술가이고 싶은 욕구가 강력하다. 소설은 엄격한 논리와 이데올로기, 세계관의 깊이를 확보해야 하기에 반은 학문적인 느낌이 있다. 우리나라는 주자학의 DNA도 있어 특정 이데올로기나 세계관을 앞세우거나 명분을 내세워야 작가로 유리하지만, 나는 예술적인 작가, 예인으로서의 작가이고 싶다. 그런 이미지로 기억해줬으면 한다.”
―원고 쓸 때 서너 갑씩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는데.
“광장으로부터 밀실로, 청년작가에서 더 깊어지는 작가로 되돌아오는 과정에 번뇌가 많아 2019년 스페인 산티아고로 순례를 갔다. 800킬로 가까이 되는데 실패하지 않고 37일 만에 완주했다. 그런데 도착하니까 열이 올라서 병원에 갔더니 폐렴이라고 하더라. 입국해 정밀 검사을 받아보니 폐암이었다. 2019년 9월, 폐를 4분의 1쯤 떼어내는 폐암 수술을 받았다. 폐렴을 앓고 폐 수술한 두 달간 담배가 들어가지 않더라. 자연스럽게 피지 않게 됐다.(금연하니 어떤가) 고등학교 때부터 한 60년 피었던 것 같다. 지금은 냄새도 나지 않고, 끊기는 잘 한 것 같다. 다만 담배를 핀 내 자신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자기 학대, 자기 모멸감, 트라우마로부터 비롯된 측면이 많다. 구원은 자기학대에 있는데, 그 과정으로 흡연을 생각해보면 후회는 없다.(건강이나 일상은 어떤지) 인생에서 한가한 적이 없었다. 열렬히 글을 쓰고 매년 책을 내 ‘문학전사’처럼 살았다. 인기 작가였을 때는 문단 사람들에게 헌신하고 아내나 가족, 친구 등 가까운 사람에겐 헌신하지 못했다. 한가하게 책도 읽고 가까운 사람과 사랑하며 살 수 없었을까, 그것을 꿈꿨는데, 요즘 시간이 많아 꿈꾸던 대로 산다. 개인으로 보면 행복하고 편안하다. 1년 전부터 1주일에 한 번씩 학원에 가 유화 그림을 배우고 그린다. 산책도 자주 한다.”
잠깐 4, 5일 정도 논산 집필실에 내려갔다가 서울로 다시 올라오는 식으로, 박범신은 요즘 주로 서울에서 지내며 소설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소설은 가슴 어디에선가 “배뱅이, 일종의 신명 같은 게 와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소설 쓰고 싶은 욕망이 도저해 져서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중동의 시간이죠. 때가 오면 글을 쓸 것이고, 지금은 제 안에 물이 고이기를 기다리는 상황이죠.”
‘배뱅이’가 아직 오지 않은 그가 이날 기자에게 건넨 책은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이야기를 담은 대산문학상 수상작 『고산자』(문학동네)였다. 전철 안에서 시선은 책 속으로 급하게 빨려갔고 고산자가 지토선에 올라 김포를 거쳐 강화로 빠져나가며 바우에게 남긴 마지막 말에서 멈춰섰다. “그야...지도를 그리지. 이제, 바람이...가는 길을 그리고, 시간이 흐르는 길을 내 몸 안에 지도에 새겨 넣을까 하이. 오랜...옛산이 되고 나면 그 길이 보일 걸세. 허헛, 내 처음부터 그리고 싶었던 지도가 사실은 그것이었네.”(347쪽)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남정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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