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손병관, 왕의서재)’ 같은 책이 나오는 것이 비극의 탄생이다.”
“왠지 모르게 ‘김지은입니다(김지은, 봄알람)’ 출간 때가 떠올라 씁쓸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얼굴 사진을 표지에 커다랗게 넣고, 그의 성추행 의혹에 의문을 제기하는 내용을 담은 도서 ‘비극의 탄생’이 출간된 지 2주일여. 이 책에 비판적인 온오프라인상 반응을 종합하면 위와 같았다.
‘비극의 탄생’과 ‘김지은입니다’가 많은 이들에게 오버랩 된 건 우연이 아니다. 두 책은 각각 박 전 시장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라는 지방자치단체장에 의한 권력형 성폭력 사건을 다루고 있다. 둘 다 법원, 인권위 등에 의해 성폭력 사실이 인정됐지만 피해자는 끈질긴 2차 가해에 시달렸다. ‘비극의 탄생’은 박 전 시장 사진을 표지에 씀으로써, ‘김지은입니다’는 피해자가 직접 내용을 서술함으로써 각각 사건의 당사자가 전면에 등장했다.
이 같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두 책은 출간 직후 상반된 대접을 받았다.
‘비극의 탄생’은 박 전 시장 재임 당시 서울시청에 출입했던 저자가 피해자를 ‘여자 황우석’으로 지칭하며 박 전 시장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지난달 25일 언론인권센터는 이 책에 대해 “기자로서 가져야 할 취재윤리를 어긴 책이자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된, 피해자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2차 가해의 집약체”라며 “피해자를 검열하려고 하는 태도로서 매우 폭력적”이라고 비판했다.
5일 국민의힘 김상훈 의원실에 따르면 이 책은 출간 한 달도 안 돼 서울 시내 공공도서관 11곳에 입고돼 모두 대출된 상태다. 서울도서관(서울시청), 종로·동작·양천·마포도서관 및 영등포 학습관(서울시교육청), 강북문화정보도서관, 은평공공도서관, 강동해공도서관, 서초구립양재도서관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도서관에 신청된 것으로 알려진 부분은 외부에 대출은 안 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관계자는 6일 “해당 책은 소속 연구자들의 젠더 폭력 관련 심도 깊은 연구 진행을 위해 구비된 자료”라며 “모든 자료는 연구 활동 지원이 우선 목적이며 외부인은 신착자료 검색 및 자료실 현장 열람은 가능하나 대출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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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지난해 이맘 때 세상에 나온 ‘김지은입니다’는 출간 직후 철저히 외면받았다. 세간을 그토록 떠들썩하게 했던 안희정 사건의 피해 당사자가 쓴 기록임에도, 한때 이 사건에 대한 자극적인 보도와 입소문이 난무했던 분위기가 무색할 만큼 이 책에 대해선 잠잠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을 펴낸 페미니즘 출판사 봄알람의 이두루 대표는 당시 “주요 언론에서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세상의 상식과 우리의 상식이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언론 보도 대신 돌아온 건 서점 매대에서 이 책이 훼손된 채 발견됐다는 연이은 제보였다.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대형 서점 광고, 도서관 입고 신청 등이 거부당하기도 했다.
여러 공공도서관에서 이 책의 신청에 대해 ‘부적합 회신’을 했다는 논란이 지난해 11월쯤 언론 보도로 불거지자 해당 도서관들은 그제야 “금서로 지정됐던 건 아니다. 여론 추이를 보고 사도 되지 않을까 해서 보류했던 것” 등의 궁색한 답변을 내놨다. 대법원 유죄 판결이 나오고 꽤 시간이 흘러 출간된 책이었음에도 눈치를 보다 뒤늦게 구매 결정을 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사서나 서점 MD들이 성폭력에 대한 편견에 영향을 받아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면 책임감이 부족한 것이란 비판이 제기됐다.
이러한 난관을 딛고 ‘김지은입니다’는 출간 수개월 뒤에야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책을 직접 읽은 독자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남긴 서평이 조용히 입소문을 타면서 반전의 기미를 보였다. 그러다 지난해 7월 박 전 시장 사건이 터지면서 단숨에 화제의 책이 됐다. 위력 성폭력 피해자가 쓴 책이 또 다른 위력 성폭력 사건에 의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현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극사실주의 문학과 같았다. 그렇게 ‘김지은입니다’는 역주행 베스트셀러가 되더니 2020년 각종 기관이 선정한 ‘올해의 책’에 이름을 올렸다.
두 권의 책을 통해 드러나는 차이는 우리에게 또 한 번 불편한 진실을 상기시킨다. 대중은, 미디어는, 도서관은, 서점은 왜 이렇게까지 다른 반응을 내놓았을까. 매번 우리의 눈치와 손가락질이 향한 곳은 어디였고, 그것이 가리키는 바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것이 근절되지 않는 성 불평등 사회의 뿌리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김지은입니다’가 결국 일으킨 반전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이 책의 성공은 무언의 변화가 시작됐다는 신호탄이었음을 많은 여성들이 공감하고 있다.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던 세상에 낸 균열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큰 파괴력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이다.
정지혜 기자
*‘정지혜의 빨간약’은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그랬듯 빨간약을 먹고 나면 보이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예민하게 분석해보는 코너입니다. 다루었으면 하는 주제가 있다면 제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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