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거래소 상장 미끼 투자자 끌어들여
알트코인 ‘메디블록’ 3개월 새 무려 3330% ↑
종이 찍듯 발행… 소수 사람이 유통량 조절
공시의무 등 없어 투자 피해 구제 불가능
美 증권거래위, 리플 발행 ‘리플랩스’ 기소
리플 패소 땐 사망선고… 규제 강화 불 보듯
승소하면 제재 방법 없어 가격 폭등 예상
소송결과 따라 국내 시장도 재편 가능성
가상화폐에 투자하던 A(30)씨는 카카오톡 채팅방 등지에서 한 가상화폐가 빗썸 등 거대 거래소에 곧 상장되니 투자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A씨가 투자 권유를 받은 B코인이 가상화폐 거래소 중 하나에 상장돼 있고 앞으로 빗썸이나 업비트 등 규모가 큰 거래소에도 상장될 것이라는 설명을 보탰다. 다른 익명의 권유자는 180∼220원에 해당 가상화폐를 사라며 매수구간도 정해 줬고, 특정 시세 이하에는 매도 금지 명령까지 내렸다. 보안 유지와 단속을 위해 투자에 참여하려면 자신의 신분증을 사진 찍어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A씨는 덜컥 리딩방 지시에 따라 투자를 했다가 B코인이 한때 30원까지 급락하면서 큰 손실을 보았다. A씨는 “(리딩방에서) 정해준 가상화폐가 상장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면서 온라인상에 어떻게 댓글을 작성할지도 구체적으로 지시한다”며 “하지만 투자자가 손실을 보아도 책임은커녕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하기에 이렇게 제보하게 됐다”고 말했다.
2일 가상화폐 업계 등에 따르면 최근 가상화폐 정보를 공유하는 ‘리딩방’을 중심으로 비상장 가상화폐를 둘러싼 가짜뉴스가 기승을 부리면서 A씨처럼 피해를 보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비상장 가상화폐란 비상장 주식처럼 발행처로부터 출시는 됐지만 거래소에 상장되지 않은 가상화폐다. 규모가 작은 거래소에 상장됐지만, 빗썸이나 업비트 등 대형 거래소에 상장되지 않은 가상화폐도 비상장 가상화폐로 분류된다.
하지만 이 같은 비상장 가상화폐는 변동성이 클뿐더러 대형 거래소에 상장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될 수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기업과 재무제표가 있는 비상장 주식과 다르게 비상장 가상화폐는 목적도 출처도 불분명한 경우가 많아 위험성이 더 크다.
위에 언급한 B코인이 대표적이다. 이 가상화폐는 한 스타트업이 발행한 가상화폐로 문화 콘텐츠 구독과 공유를 기반으로 각종 문화사업에 쓰일 수 있다고 홍보되고 있다.
중소형 가상화폐 거래소에 상장된 이 가상화폐는 온라인 등지에서 최근 대형 거래소 상장을 미끼로 투자자가 몰렸다. 지난달 초까지만 해도 70원대였던 이 가상화폐는 불과 일주일 만에 5배 이상 급등했다가, 이후 급락해 다시 80원대 시세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비상장 가상화폐 범람은 전 세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송금 수수료를 받지 않는 목적으로 출범됐다는 C코인 역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곧 상장될 것이라고 홍보하며 투자자를 끌어모으고 있지만, 정작 이 가상화폐는 최근 싱가포르 거래소에서 상장 폐지를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비상장 가상화폐는 다단계 금융사기(폰지 사기)에 노출될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12월 17일에 ‘매일 4% 수익을 안겨주겠다’는 ‘얼랏코인’이 발행돼 국내 소형 거래소에 상장됐다. 이 가상화폐는 다른 거래소에도 상장될 것이라고 홍보하며, 시세가 말 그대로 매일 4%씩 상승하며 두달 동안 수십배 뛰었다. 하지만 3월 초 투자금을 터는 행위인 ‘설거지’ 시간이 도래하자마자 한 시간 만에 99% 폭락했다.
◆투자자 홀리는 ‘알트코인’
서울에 사는 이모(34)씨는 얼마 전 가상화폐 ‘칠리즈’를 500만원어치 샀다가 3000만원으로 ‘수익률 500% 대박’을 경험했다. 이씨의 삶을 대하는 태도는 대박 전후로 달라졌다. 이씨는 직장 업무는 소홀히 한 채 온종일 가상화폐 거래소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24시간 거래되는 가상화폐 특성상 잠도 줄여가며 알트코인 시세 차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씨에게 월급 따위는 점점 무의미해졌다. 이씨는 전 재산을 알트코인에 ‘올인’할 생각이라고 했다. 투자금을 모두 잃을 수도 있지만 행운만 따라준다면 한강이 보이는 서울 입지 좋은 곳에 아파트 1채를 살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설레곤 한다.
‘한강뷰’ 또는 ‘한강물’. 큰 수익을 거둬 한강뷰가 있는 아파트에 사느냐, 한순간에 폭락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느냐. 알트코인(비트코인을 제외한 가상화폐)의 민낯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1일 기준으로 한 달간 알트코인 중 상승률 1위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띄운 것으로 유명한 도지코인(526.56%)으로 나타났다. 그 뒤를 이어 이더리움클래식(182.76%), 리플(148.36%), 비트코인골드(135.03%) 순이었다. 3개월 동안 가장 많이 상승한 알트코인인 메디블록은 무려 3330.80% 급등했다.
상상을 초월한 급등세로 투자자를 홀리는 알트코인은 가상화폐 대장인 비트코인과 유사해 보이지만 차이점이 있다. 비트코인은 특정 발행인이 없고 원한다면 누구나 채굴할 수 있는 데다가 유통량도 제한돼 있다. 하지만 상당수의 알트코인은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이해만 있으면 누구나 만들어낼 수 있다.
발행자의 의도에 따라 종이 찍듯이 발행할 수도 있어 소수의 사람이 유통량을 조절할 수 있다. 물론 각 가상화폐 거래소의 상장 심사를 통과해야 거래가 가능하지만, 공시의무 등 법적 장치가 없어 관련 정보를 완전히 신뢰하기 어렵다. 따라서 투자자가 피해를 본다 해도 구제를 받을 길이 없다.
◆전 세계 알트코인 비상
전 세계 금융 당국도 최근 알트코인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비트코인의 경우 몇몇 국가에서 비트코인 파생상품을 만드는 등 활용방안을 모색할 정도로 서서히 제도권에 진입하고 있지만 알트코인은 그렇지 않다. 알트코인은 화폐 발행도 정부가 아닌 개인이 할 수 있는 데다가 전망성도 불투명해 다수의 투자 손실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연말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알트코인 중 하나인 리플 발행사인 ‘리플랩스’를 기소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SEC는 리플이 증권이지만 SEC에서 정식 등록 절차를 밟지 않았다고 판단해 기소했다.
SEC는 리플을 증권으로 본 이유로 △돈을 투자했는가 △투자하면서 수익을 얻을 거란 기대가 있었는가 △다수가 토자한 돈이 공동 기업에 속해 있나 △수익은 자신의 노력 대가가 아닌 돈을 모으는 자 등의 결과에서 비롯되는가 등 4가지였다.
SEC는 리플랩스라는 중앙에서 리플 발행을 하며 이에 투자 가치를 담았다고 해석했다. 아울러 리플랩스가 리플을 판매해 최소 13억8000만달러(약 1조5414억원)의 자금을 조달하는 등 사실상 증권사 역할을 했다고 봤다.
이를 두고 SEC가 리플을 알트코인 단속의 본보기로 삼은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리플이 소송에 지면 SEC는 다른 알트코인을 단속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 리플은 알트코인들 중에서 시총 규모가 3위인 거대 알트코인이다. 이병욱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는 “대부분 알트코인들은 리플처럼 중앙에서 발행하고 관리하는 구조로, SEC는 리플뿐만 아니라 다른 알트코인을 규제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SEC와 리플의 소송전은 알트코인의 사활을 가를 수 있어 업계 전체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국 대형 가상화폐 거래소인 코인베이스 등에서 상장폐지 당한 리플이 소송에서 진다면 사실상 사망선고와 다름없다. SEC는 리플의 판례를 근거로 리플 이외의 알트코인을 하나씩 규제할 가능성이 크다. SEC와 리플의 소송전 이후 다른 알트코인이 하나둘씩 기소된다면 미국 거래소에서 상장 폐지와 시세 급락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앞서 리플도 지난해 12월 22일 기소되면서 글로벌 가상화폐 시세 사이트인 코인마켓캡에서 가격이 0.51달러에서 0.26달러로 49.02% 폭락한 바 있다.
반대로 리플이 소송에서 이기면 상황은 급반전된다. 미국 SEC를 포함해 전 세계 각국에서 상당수의 알트코인을 직접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이 당분간 사라지면서 알트코인 가격 상승이 점쳐진다. 한 가상화폐 관계자는 “리플의 소송 결과에 따라 국내 가상화폐 시장에서도 알트코인 재편성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한다”며 “리플이 소송에 지면 리플은 물론 다른 알트코인도 급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ICO 후속조치 미흡 … 알트코인, 선진국보다 몇 배 많아
국내 거래소에는 미국과 일본 등과 달리 ‘잡코인’이라 불리는, 정체도 불분명하고 변동성이 큰 ‘알트코인’이 선진국에 비해 몇 배나 많은 것으로 파악됐다.
2일 가상화폐 업계에 따르면 국내 거래소 업비트에 상장된 가상화폐는 178종으로 집계됐다. 빗썸에선 170종이 거래되고 있다. 반면 미국 최대 거래소 코인베이스에 상장된 가상화폐는 58종에 그친다. 일본 최대 거래소 비트플라이에 상장된 가상화폐는 5종으로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규모가 큰 가상화폐만 거래한다. 일본 전체에서 거래되는 가상화폐를 합쳐도 30종이 되지 않는다.
이같이 국내 거래소에서 정체 불명의 알트코인이 많아진 배경으로 국내에서 가상화폐를 발행해 상장하는 ‘가상화폐공개(ICO)’ 제도의 후속조치 미비가 꼽히고 있다. 지난 2017년 9월 국내에서 ICO를 전면 금지한 이후 달라진 것이 없어 국내 가상화폐 업체들은 규제를 피하고자 싱가포르 등 해외에서 가상화폐를 발행해 국내 거래소에 상장하고 있다.
올해 초 3.2원에서 넉 달 만에 30.60원으로 상승한 엠블, 카카오페이와 롯데글로벌로지스가 설립한 합작사와 협업한 디카르고, 디지털 콘텐츠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는 가상화폐로 같은 기간 8배 상승한 픽셀 등이 대표적이다.
발행 업체들이 해외에서 알트코인을 발행해 국내에 상장하는 것 자체가 불법은 아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상장이 까다로운 미국·일본과 달리 국내에선 명확한 기준이 없어 알트코인 범람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지난 2017년 가상화폐 대란으로 ICO를 금지하는 등 규제가 나왔지만, 이후 4년 동안 사실상 손놓고 있다보니 지금 상황에서의 대응책이 부족하다”며 “올해 초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가 갑자기 폭등할 거라고 예상 못 했고, (가상화폐가) 특정 부처가 담당하기에도 모호한 성격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가상화폐 거래소에 자금세탁방지 의무를 부과한 개정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에 관한 법률(특금법)이 시행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금융당국에 신고한 가상화폐 거래소는 전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고기한인 오는 9월 24일 전에 영세 가상화폐 거래소들이 무더기로 폐업할 가능성이 큰 만큼 이용자들은 거래소의 사업 지속 여부 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편 특금법에 따라 사실상 가상화폐 거래소에 대한 ‘종합 검증’ 역할을 떠안게 된 시중은행들은 실사 과정에서 적용할 지침을 마련하고 본격 검증 준비를 마친 것으로 전해졌다. 은행연합회는 최근 시중은행들에 ‘자금세탁방지(AML) 위험평가 방법론 가이드라인(지침)’을 내려보냈다.
김범수 기자 sway@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