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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장 코앞서 도로통제 않고 마구잡이 철거 ‘후진국형 사고’

입력 : 2021-06-10 20:00:00 수정 : 2021-06-10 18: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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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안전불감증이 낳은 人災 언제까지

사전징후 알고도 작업자들 대처 미흡
“버스승강장 위치만 미리 옮겼더라도…”

감리업체 상주직원도 없어 관리 ‘구멍’
관할구청도 사전 점검 한차례도 안 해
안일한 대응에 대형 인명피해 못 막아

2년 전 잠원동 붕괴사고 때와 판박이
시민들 “공사장옆 불안해서 못다녀”
합동 감식 10일 광주 동구 5층 건물 철거·붕괴 현장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경찰·소방 관계자들이 합동감식을 진행하고 있다. 광주=뉴스1

17명의 사상자를 낸 광주 학동 건물 붕괴는 이상징후를 미리 안 작업자들의 안일한 대응과 위험한 승강장을 옮기지 않는 등 총체적인 부실이 낳은 후진국형 인재인 것으로 드러났다. 대형 인명피해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났지만 누구도 이를 개선하지 않았다.

◆사전징후 알고도 작업자만 대피해 눈총

지난 9일 철거 건물이 무너질 당시 특이 소음이 나는 등 이상징후가 보였다. 당시 작업현장에 있던 굴착기 운전사 등 9명은 붕괴를 직감하고 곧바로 대피해 화를 면했다. 하지만 작업자들이 대피하면서 인도만 통제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시민들의 분통을 사고 있다. 건물 붕괴 시 도로의 차량을 덮칠 수 있는데도 도로를 통제하지 않아 대형 인명피해를 막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위험이 상존한 시내버스 승강장 위치를 옮기지 않아 결국 인명피해로 이어졌다. 주민들은 “공사기간만이라도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승강장을 잠시 옮겼더라면 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참변이 일어난 승강장은 동구 지원동과 무등산 방향으로 진행하는 14개 노선버스가 정차하는 곳으로, 출근 시간대에는 수백명이 이용한다. 위험한 승강장을 피해 일부 주민들은 300~400m 떨어진 또다른 승강장까지 걸어서 이동해 버스를 이용했다. 재개발사업과 위탁 철거공사를 진행해온 시공사, 시행사 측 어느 누구도 승강장 이설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공사현장 인근에 신호수 2명만 배치했다.

9일 발생한 17명의 사상자를 낸 철거 건물 붕괴사고와 관련, 지난 1일 철거 업체가 해체계획서를 준수하지 않고 철거를 진행했음을 증명하는 사진이 나왔다. 사진 속에는 굴착기가 건물의 저층을 일부 부수고 있는 모습이 찍혔다. 연합뉴스

◆철거현장에 감리자 없어 관리 부실

건물 철거 당시 현장에 관리감독을 전담하는 감리업체 직원이 없었다. 재개발지구의 시공사인 권순호 HDC현대산업개발 대표이사는 “감리업체는 비상주감리로 계약이 돼 있어 당시 현장에는 상주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며 “상주냐, 비상주냐에 대한 문제는 철거계획서에 따라 공사가 이뤄진다”고 답했다.

건축 감리는 비상주감리와 상주감리로 나뉜다. 감리자가 상주하지 않는 비상주 감리는 공사 중 주요 공정 때만 현장에서 감리를 진행하고 평소에는 현장에 상주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비상주감리라 철거 당시 감리가 없는 게 위반은 아니다. 하지만 시민들은 해체작업의 위험도를 고려하면 현장에 감리자가 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감리 일지를 작성하고 보고하려면 위험하고 중요한 공정은 직접 눈으로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자체도 건물 붕괴 전 안전사고 예방 등을 위한 사전점검 등은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임택 광주 동구청장은 이날 상황실에서 브리핑을 열고 “건물 철거계획 허가 이후 단 한 차례도 구청이 나서 자체적으로 현장 점검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조현기 건축과장은 “사고 이전 여러 건물 철거과정에서 분진과 소음 등에 관한 민원이 3∼4차례 발생해 점검한 적은 있다”면서도 “현장 감리단이 있기 때문에 구청이 나서 위험요소를 사전에 파악하거나 제거하기 위한 점검은 이뤄지지 않았고 필요성도 못 느꼈다”고 설명했다.

동구는 “현장 시공사를 담당한 A기업 대표와 감리를 담당한 B건축사사무소 소장 등 2명을 고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원청 시공사인 HDC현대산업개발은 A기업과 하청계약을 맺고 현장 철거작업을 맡겼고, 주택개발정비사업조합은 B건축사사무소에 현장 관리감독을 위임했다.

10일 오후 광주 동구 학동 재개발구역 '철거 건물 버스 매몰 사고' 현장에서 소방당국이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다. 뉴시스

 

 

◆잠원동과 유사한 인재 재발

이번 철거 건물 붕괴 사고는 2년 전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서 발생한 사고와 닮은 꼴이다. 2019년 7월 4일 오후 2시 23분쯤 잠원동에 있는 지상 5층, 지하 1층짜리 건물이 철거작업 중 붕괴됐다. 현장 옆 왕복 4차로를 지나던 차량 3대가 무너진 건물 외벽에 깔렸다. 승용차에 타고 있던 여성은 매몰 약 4시간 만에 구조됐으나 숨졌고, 동승자 등 3명이 다쳤다. 피해자들은 결혼을 앞두고 결혼반지를 찾으러 가던 길에 참변을 당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날 잠원동의 한 먹자골목에서 만난 일식점 사장 임모(54)씨는 “건물 크기도 비슷하고 내부에서 붕괴 조짐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닮았다”며 “비슷한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공사장 옆은 불안해서 피해 다닌다”고 말했다. 당시 사고를 목격했다는 또다른 식당의 직원 이모(60)씨도 “사고 이후 공사장 자체를 무서워하게 됐다”며 “안전관리를 잘 못 했기 때문에 사고가 벌어지는 것 같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2019년 7월 4일 오후 철거 중이던 건물이 무너져 인명피해가 난 서울 서초구 잠원동 철거현장에서 경찰 관계자등이 현장 감식 활동을 벌이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당시 경찰은 철거 현장에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해 현장소장과 감리보조 등 2명을 업무상 과실치사상 및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또 건축주 2명과 건축주 업무대행, 감리, 굴착기 기사, 철거업체 대표 등 6명을 불구속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광주=한현묵 기자, 이종민 기자 hansh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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