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영, 꼬마불상 빼곡한 ‘엄마의 신전2’
지적장애 가진 동생 돌본 경험 풀어내
현실과 미신의 대비가 주는 긴장 깔려
정정하 복귀작 ‘액화된 빛’ 연작 발표
아버지의 페인트가게서 일한 경험 소재
손님들이 찾는 고유 색 저장시켜 투영
불상을 모신 불전이 검붉게 물들어있다. 불상 뒤로는 수십, 수백개의 꼬마 불상들이 빼곡하다. 크고 작은 불상들은 모두 누군가가 간절히 빈 소망의 증거물이다. 손을 비비고 무릎을 꿇었다가 일어나길 반복하며 빈 소원, 또는 욕망의 증거물이다. 그 소원의 벽을 아무렇지 않게 등지고 천진난만한 표정인 어린이가 있다. 어떤 것도 욕망하지 않고 그저 그 순간 순수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어린이만이 캔버스 화면에서 가장 자유로운 존재로 보인다. 문지영 작가의 ‘엄마의 신전 2’는 특유의 붉은 화면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금빛 불상과 단청의 빛깔이 아름답다고들 하는 곳에서, 작가는 왜 이토록 시뻘건 색을 칠했을까.
작가는 말했다. “사람들이 절에 가서 소원을 빌며 시주를 하고 기도를 한다. 나 자신을 위한 간절한 기도이기도,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바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때로는 당사자는 원치 않는 것이기도 하고, 사회 통념이 정한 기준에 대한 욕망이기도 하다. 그 마음들을 드러내는 행위에 대한 내 인상이 붉은색이었다.”
광주 서구 농성동에 위치한 광주시립미술관 분관 하정웅미술관에서는 이 시대를 바라보는 젊은 작가들의 다양한 시선을 펼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제21회 하정웅청년작가초대전 빛 2021 ‘어떤 날, 어떤 이야기’(이하 ‘빛전’) 전시다. 매년 전국에서 작가를 선정해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초대전에 올해는 문소현, 문지영, 이윤희, 정정하 작가가 활약했다. 각각 경기, 부산, 광주, 대전을 기반으로 활동해온 작가다. 분야 또한 다양하게 각각 미디어아트, 회화, 조각, 회화 및 설치 작품을 내놓아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진솔한 이야기를 개성있는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문지영 작가는 시각장애와 지적장애를 가진 동생을 돌봐온 삶의 경험을 끈질기게 작품에 풀어내왔다. 사회로부터 배제되거나, 주변적인 존재와 이들을 향한 시선의 폭력성을 드러내 ‘보통’의 가치에 대해 질문해왔다. ‘가장 보통의 존재’ 연작에 이어 최근 선보이고 있는 작업은 ‘엄마의 신전’ 연작. 장애를 가진 막내딸에 대한 양육 책임이 지워진 엄마, 그 무거운 짐 속에서 절에서는 특별한 의식으로, 일상에서는 집안 곳곳에 자기만의 ‘신전’을 차려놓고 기도했던 엄마의 삶을 바라보는 작품이다. 책임은 무겁지만 해결할 권력은 없던 엄마들을 향해서는 연민과 애정어린 시선을 보내고, 그런 엄마들이 놓인 위치에 대해서는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엄마의 신전’ 연작에는 실재와 미신, 과학과 비과학, 현실과 소망 사이의 간극과 대비가 주는 긴장이 깔려있다. 그 간극 한가운데에 놓인 일상은 잔인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불 꺼진 집에서 혼자 강렬한 인공 야광을 발산하는 수족관 위의 신전, 피아노 위 인형들 틈에서 발견되는 성주단지, 작가 특유의 화사한 색감으로 표현된 예쁘고 아기자기한 일상 풍경 속에 놓인 기도의 흔적들이 그렇다. 전시장에서는 엄마 관람객들이 그림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고 한다.
정정하 작가의 작품 ‘액화된 빛’ 연작도 관람객의 시선을 붙든다. 스테인리스 캔버스 위에 색이 박제된 듯한 작품이다. 매끈하게 특수 제작된 스테인리스 캔버스 위에 건축용 페인트가 한 번의 붓질로 그어진다. 붓질은 투명한 건축용에폭시레진으로 도톰하게 덮인다. 그 위엔 페인트 색깔 고유의 번호와 그 색을 골랐던 사람들을 기억하는 작가가 매긴 번호가 하나의 일련번호가 돼 암호처럼 새겨지자 매력적인 추상화가 됐다.
그의 이색 이력은 작품의 직접적인 동기이면서, 동시에 작품을 돋보이게 한다. 늦은 나이에 미대에 입학하고 졸업 후 결혼, 출산, 육아로 이어진 삶에서 작품활동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는 주부로 살며 아버지의 페인트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길 8년쯤 됐을 때 다시 붓을 들었다. 작가는 “하고 싶은 것보다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을 우선해 살고 있었지만, 작품활동을 하라는 주변의 권유, 작가의 꿈을 이뤄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다시 작품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정 작가 역시 삶의 고유한 경험이 개성있는 작품으로 이어졌다. 가게를 찾았던 손님들과 색이 작품 소재가 된 것이다. 페인트 가게는 같은 색도 회사별로 조금씩 다른, 어쩌면 가장 미적인 색채의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다양한 색을 고르고 섞으며 조색했다. 손님들은 모두 자신만의 공간에 칠할 색을 고르느라 고민했고 기대에 부풀었다. 작가는 “그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에너지를 채집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타인에 대한 관심, 타인에게서 꿈과 희망의 에너지를 보는 시선, 그걸 고유의 색으로 저장한다는 발상과 기법이 흥미롭다.
홍윤리 학예연구사는 “작품에 담긴 이야기는 거대담론이 아닌 일상의 삶 속의 작가 자신에 대한 성찰이며 평범한 주변 생활에서 느낀 사회의 이면들을 미시적 콘텐츠화한 것”이라며 “개인의 서사를 시작으로 담아낸 이들 작품은 작은 촛불처럼 파편화되고 왜소했지만 고착화된 사회를 거부하고 저항하며 사회적 정체성을 파악하는 의미를 확보한다”고 설명했다. “특수하면서도 보편적 공감을 주고, 삶의 내면을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빛전’이란?
빛전은 평생 수집한 작품 1만2000여점을 기증한 재일동포 2세 사업가 하정웅의 뜻을 기려 시작된 청년 작가 초대전이다.
하정웅은 전국 곳곳에 1만여점을 기증하고 광주시립미술관에 2523점을 기증했다. 그의 기증작품은 광주시립미술관 소장품의 절반을 차지한다.
주요 한국 근현대 작가는 물론 피카소, 샤갈 등 20세기 해외 거장 작품들이 기증됐다. 특히 재일작가 작품과 일본 작가 작품들은 하정웅 컬렉션의 독보적인 특징이어서 의미가 깊었다.
전화황, 곽인식, 곽덕준, 이국자, 이타미 준 등 수집 작가 범위도 넓었고, 역사적으로 남다른 가치를 가진 작품들도 포함됐다. 일제강점기 일본 아키타현 오다테시 하나오카 구리광산에 강제징용당한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이 가혹한 노동과 학대에 항의하다가 살해당한 사건을 목판화와 서사시로 표현한 ‘하나오카이야기’ 판화, 일본인으로서 광주의 5월 민주화항쟁을 모티브로 작업한 도미야마 다에코의 판화 등이다. 사회적·정치적으로 불우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이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을 애도하는 기도와 위령의 의미를 지닌 미술품들을 중심으로 컬렉션을 형성했다. 개인 수집가가 이러한 고유한 특징을 형성해나간 것은 컬렉션의 우수한 특성이라는 설명이다. 이건희 컬렉션이 기증되기 전까지, 하정웅 컬렉션은 개인 소장가가 수집한 컬렉션으로는 유례를 찾기 힘든 기증이었다고 한다.
미술관은 하정웅의 뜻을 기려 분관 하정웅미술관을 건립했고, 매년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30세 이상 45세 이하 청년 작가들을 선정해 초대전을 열고 있다. 기증자의 메세나 정신을 이어받아 청년 작가 지원과 발굴을 제도화한 것이다. ‘빛2021’, ‘빛2020’ 하는 식으로 ‘빛’에 해당 연도를 붙여 부르길 21년째가 됐다. 그 사이 이 전시는 약칭 ‘빛전’으로 불리게 됐다. 올해 ‘빛전’은 11월28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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