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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공간이 만들어낸 삶의 변화… 미술의 눈으로 동시대 조명

입력 : 2021-11-11 19:37:00 수정 : 2021-11-11 19:3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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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 4명 전시회

음향·영상·설치 작업 중심 김상진
메타버스·가상화폐 등 소재로 표현

피아노 전공 이색 이력의 작가 오민
시각화된 ‘헤테로포니’ 다양성 그려

‘큐빗 투 아담’ 제목으로 꾸민 최찬숙
거대한 스케일의 화면에 시선 압도

한국미술 다양한 조류 거쳐온 방정아
‘흐물흐물’ 허물고 섞이는 상상 풀어내
김상진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김상진, 방정아, 오민, 최찬숙. 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의 작가상’ 후보 4명을 선정하고 최근 전시를 시작했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올해의 작가상 2021’ 전시의 막을 올리는 이는 김상진 작가다. 음향, 영상, 설치 작업을 중심적으로 해 온 그는 ‘비디오 게임 속 램프는 진짜 전기를 소비한다’는 제목의 전시를 준비했다.

그의 전시 공간은 첫인상부터 유토피아를 기다리는 설렘과 기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 등이 혼합된 공기가 공간을 꽉 채운 느낌을 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네온 색감의 설치작품들과 그에 조화되는 음향이 동시에 관람객의 눈과 귀를 신선하게 자극해오며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전시 공간 한가운데에는 텅 빈 책걸상들이 놓여있고,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할 법한 학생들의 하반신이 하늘로 떠올라 천장에 매달려 있다. 그 주변으로 한쪽에는 초록색 크로마키 벽 앞에 웅크린 인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I will disapear’(나는 사라질 것이다)라는 문구가 쓰여진 설치작품이 있다. 인터넷 세상 속에서 무엇이든 지워낼 수 있는 크로마키 그린은 그 앞에 한 인간을 투명인간으로 지워내고, 사라지겠다고 똑똑히 말하는 작품은 이미 그 선언조차 증발된 그림자를 작품 뒤 벽면에 만들어낸다. 그는 기술이 변화시키는 현실 모습을 재빠르게 포착하고 시각화해온 작가다. 특히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은 작가에게 인간의 가상 경험이 급증한 시기로 보였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메타버스, 가상화폐 등 팬데믹 이후 급격히 증가한 가상 경험이 우리의 인식체계를 어떻게 바꾸는지, 인간의 모습은 어떻게 바뀔지 조명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4차 산업혁명 이후 디지털 혁명과 기술의 일상 침투가 세계를 어떻게 바꿀지에 대해 중립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그 안에서 느끼는 실존적 감정이나 우리가 겪게 될 현상을 관조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소개했다.

오민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시는 오민 작가의 ‘헤테로포니’로 이어진다. ‘헤테로포니’란 동일한 선율을 여러 사람이 조금씩 다르게 동시에 연주하는 것을 뜻하는 음악 용어다. 똑같은 악보를 보고 똑같은 방식으로 연주하려고 해도,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연주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을 이용해 다양성이 살아있는 집단 연주 유형으로 자리 잡게 한 것이다. 오민은 피아노를 전공한 이색 이력을 가진 작가다. 음악을 시각예술화한 것이 그의 이번 작품이다. 스튜디오에 한 사람을 앉혀두고 각각 사람의 손으로 찍은 영상, 사람이 삼각대를 놓아 찍은 영상, 기계가 찍은 영상을 동시에 중계하듯 나란히 보여준다. 전시 공간에는 커다란 스크린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직전 김상진 작가의 공간과 또다른 느낌을 전한다. 무엇이든 관람객이 사유를 하게 하고 싶다는 작가는 예술의 형식 실험에 집중하는 듯하면서도, 시각화된 헤테로포니가 ‘지금’, ‘동시’라는 개념이 동일성을 보장하는 것인지 묻기도 한다.

최찬숙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어 ‘큐빗 투 아담(qbit to adam)’ 이란 제목으로 꾸민 최찬숙 작가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다시 장내를 압도할 듯한 거대한 스케일의 화면이 시선을 당긴다.

바닥을 향해 비스듯이 기울어져 관람객을 내려다보는 듯한 화면 속에는 칠레의 광산에서 작가가 직접 찍은 영상이 흐른다. 최찬숙은 땅에 정주하지 못하는 이들, 이주자들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표출해온 작가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바탕이 되는 땅과 토지 소유 문제를 다뤘다.

그는 “과거의 광산부터 최근 가상화폐 채굴에 이르기까지, 노동과 소유의 역사를 파헤치는 데서 작업을 시작했다”며 “현실에 도래한 가상 공간과 시스템이 기존의 물리적 감각을 어떻게 흉내내고 실현시키려 하는지 관찰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땅이나 대기 하늘, 바람과 같은 기본적으로 개인이나 국가가 소유권 주장하기 애매한 그런 근거들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 생각해 보고 싶었다”며 “특히 코로나 이후 사이버 스페이스의 승리라고 할 정도로 현실의 시스템, 현실의 활동 등이 옮겨져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가능함이 증명된 가운데, 땅이 등장하고 거래된다는 흥미로운 지점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 무한한 공간에서 땅은 무엇인지, 어떤 개념인지, 어떤 역할을 하고, 필요한 존재인지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방정아 ‘팠어, 나왔어.’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리얼리즘, 부산형상미술, 민중미술, 여성주의 미술이라는 한국 미술의 다양한 역사적 조류가 끊임없이 욕심 내온 화가 방정아가 이번 전시의 막을 내린다. 고체가 액체가 되어 흘러내리는 모습을 묘사하는 ‘흐물흐물’이란 키워드로 회화 작품 5점을 선보인다.

그는 “성질이 다른 두 개가 만나 경계선이 무너지고 서로 섞이는 상상을 해보면서 풀어냈다”며 “흐물흐물 흘러내리는 것이 견고했던 제도나 수직적 관계일 수도, 흐물흐물해져서는 안 될 생태계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삶이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온 그는 이번에도 ‘흐물흐물’이라는 거창하지 않은 말로 관람객을 안내하면서도, 흐릿해진 정신을 깨우는 각성제와 같은 작품들을 내놨다.

부산에서 살며 작업하는 작가는 부산항 제8부두 미군기지에서 맹독성 생화학물질을 반입해 세균실험을 벌여온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부산이 발칵 뒤집히자 또다시 붓을 들고 이 문제를 화폭에 담았다. 휴전선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을, 원자력발전소 밀집지 옆에 사는 현실을 캔버스에 담고, 플라스틱으로 뒤덥힌 생태계의 현실을 걸개그림처럼 대형 천에 그려냈다. 지금 여기, 바로 우리와 주변인의 실존을 지키고자 해 온 방정아의 붓질에서는 특유의 위트, 한층 강해진 위기의식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부지불식간에 어딘가 흐물흐물해지고 있는 세계, 그 틈에 이미 세계 깊숙이 들어와 현실을 대체한 가상세계, 현실세계와 가상세계 사이 어딘가에서 예술은 인간의 실존을 찾고 있다. 각기 다른 부문에서 급변하는 현실을 예민하게 포착해 온 네 작가의 작품세계가 공교롭게도 한 지점에서 교차하고 있다.

김상진 작가(왼쪽부터), 방정아 작가, 오민 작가, 최찬숙 작가

국립현대미술관은 내년 상반기에 네 명 중 ‘2021 올해의 작가’ 최종 1인을 선정한다. 전시는 내년 3월 20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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