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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현대까지… 한반도의 찬란한 야금예술

입력 : 2021-12-09 21:00:00 수정 : 2021-12-09 20: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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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미술관 ‘야금:위대한 지혜’

신에대한 경외·호국 염원 담긴 작품 등
세밀하고 화려하면서 격조까지 갖춰
은제 아미타여래삼존좌상 최초 공개
높이 19.3㎝의 불상, 섬세함이 놀라워
무형문화재 장인들의 작품과 융합전시

콘크리트 공간에 쇠 파티션·쇼케이스
파격적 전시 연출로 관람객 사로잡아
‘야금:위대한 지혜’ 전시 전경. 호암미술관 제공
어둠을 통과해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 느낌이다. 무엇으로도 파괴되지 않는 방에 2000년간 고스란히 보존된 또 하나의 세계. 이 세계를 걸으면 깊은 무덤 속을 누비는 듯도,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우주의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부유하는 것도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왕들은 여전히 금관을 쓰고 금귀걸이를 하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지붕 끝에 토수(吐首)는 여전히 그 형태 그대로 떠 있다. 고대 어느 제사장, 사라진 삼국의 왕족, 현현한 부처와 신의 영혼이 머무는 방 같다. 공간은 소리없는 찬사로 채워진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호암미술관이 재개관전 ‘야금(冶金):위대한 지혜’를 통해 야금이야말로 인류 최초의 혁신임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야금이야말로 예술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야금 미술 작품 45점의 거대한 목소리다.

야금이란 불로 쇠를 다루는 일을 통칭하는 용어다. 광석을 채굴하고 금속을 추출하고 제련, 가공, 장식하는 것까지, 과정과 결과물 모두를 포함한다.

야금은 청동기시대 동의어나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선 기원전 10세기쯤부터 야금을 통한 청동기 문화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미술관 측은 “한반도의 야금은 청동기 시대 점진적으로 발전하다가 기원전 3∼4세기 중국 전국시대에 등장한 철기문화와 스키타이 계통 청동기문화가 요동지방에서 합류하면서 새로운 금속문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금과 은, 수정, 옥, 유리 등 보석류의 활용과 누금, 입사, 나전 등 장식기법이 발전하고, 한국 금속 공예는 세밀하면서도 격조 있는 특질을 갖춘다. 삼국시대 금동불과 금관, 통일신라시대의 화려한 보석 장신구, 고려의 세밀한 은입사 작품과 나전 공예 등은 한국미의 정수로 자리 잡는다.

◆혁신적 전시방식

전시장에 들어서면 작품에 앞서 혁신적인 전시방식부터 경험한다. 전체적으로 깜깜하게 어두운 가운데 곳곳에 서 있는 작품들이 쇼케이스 안에서 조명 빛으로 환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주제별로 공간이 구획되고, 그 구획된 벽면을 따라 걸으며 유리장 속에 갇힌 작품을 일렬로 줄을 서 들여다보곤 했던 일반적 방식을 탈피했다. 거대한 하나의 공간 곳곳에 서 있는 쇼케이스, 그 안에서 은은하지만 강렬하게 빛나고 있는 작품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아우라를 빛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가운데 유리 쇼케이스 없이 그대로 밖에 노출된 상태로, 최소한의 철제 파티션만 곁에 둔 작품들도 상당하다. 가령 고려 10세기 철조여래좌상은 관람객과 작품 사이 유리벽 없이 관람객의 공기에 노출돼 있다. 10여세기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이 부처상은 변함이 없었다는 듯, 눈앞에 놓인 철불의 아우라는 특유의 냉기와 함께 관람객 피부로 전해진다. 철불은 야금의 유구한 전통 속에 특히 주조가 어려운 작품으로 꼽힌다. 1000년 전 야금 장인들은 그런 데에 굴할 수 없다는 듯, 정면에서는 근엄하되, 측면에 온화한 미소를 숨기고 있는 신비로운 얼굴의 철불을 만들어냈다. 장벽 없는 철불과의 교감은 생생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플라스틱 벽이 놓이는 비대면 시대 인간의 처지가 스쳐지나간다.

금관이 실제 착용된 모습으로 전시된 모습. 김예진 기자

신라 금동관과 태환이식(금 귀걸이)이 놓인 방식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작품 후면에 투명 아크릴 거치대를 달고 그 위에 작품을 올렸다. 관람객 시선에서 마치 사람이 귀걸이를 하고 있을 때처럼, 사람이 왕관을 쓰고 있을 때처럼 공중에 떠 보이도록 한 것이다. 영혼을 마네킹에 담으려 하는 시도가 있다면, 이 작품들이 그것이다.

지붕 끝에 달리는 토수 역시 좌대 위에 눕혀 놓은 모습대로 측면을 관람하게 되는 통상적인 방식과 차별화했다. 투명한 아크릴 장치를 이용해 공중에 띄워 실제 사용된 모습대로 토수 얼굴이 관람객을 보도록 했다. 미술품이 만들어진 당대 시공간에 찾아온 것처럼, 관람객은 작품과 더 특별하고 생생하게 교감할 수 있다.

미술관 측은 내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앞두고 벽지를 떼어내고 바닥을 드러낸 공간에서 어떻게 전시할 것인가, 난관 속에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미술관 측은 “노출 콘크리트 공간에 쇠로 만든 파티션과 쇼케이스를 사용하는 파격적인 전시 연출로, 거친 자연에서 가장 귀한 창조물을 만드는 인간의 위대함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장인이 아니라 작가

국가무형문화재들의 창작품이 나온 것은 이번 전시의 또 하나의 미덕이다. 무형문화재들이 장인이라기보다는 작가로 조명된다. 국가무형문화재 주철장인 원광식과 입사장 홍정실, 장도장 박종군이 참여했다. 이들은 전통 금속 공예 기술을 익혀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최고의 장인들이지만, 그 전통 기술 토대 위에 자신이 터득한 기법으로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창작한 작품들을 보관해 왔다. 국가는 그들에게 전통을 얼마나 똑같이 구현하느냐만 요구했지만 이들은 달랐다. 미술관 측은 이들이 모두 자기 작품세계를 가진 예술가임에 주목했고, 동시대 시공간에서 그들이 만든 창작품을 대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런 요청이 처음인 장인들은 당황하기도, 기뻐하기도 하면서 작품을 내놓았다고 한다. 미술관 측은 삼고초려도 했다고 한다.

그들이 자기만의 방에서 꺼내 놓은 소장품들은 각자의 작가주의로 만들어진 현대예술품이자, 미래의 보물이었다. 홍정실 입사장의 ‘침묵의 상징’은 금과 은실의 미학이 평생 전통 입사의 길을 걸으며 체득하고 느낀 사유와 전통에 대한 경이로운 상징을 다채롭게 함축한 예술성 높은 작품이란 설명이다. 박종군 장도장의 은과 강철로 된 장도 3점은, 장도라 하면 조선 여성의 은장도만 떠올리는 왜곡되고 얄팍한 인식을 부끄럽게 한다.

◆예술이 된 금속문화

전시는 야금을 기술이 아닌 미술로 재정립한다. 개념적으로는 4개부로 나눠 자연과 신에 대한 경외가 상징적 기호와 추상미술화한 청동기시대 이후, 왕의 권위와 호국 염원을 표현한 삼국시대 이후, 불교 미술, 현대미술 속에서 보여준다. 국가무형문화재 작품 5점을 비롯, 국보 5점과 보물 2점이 등장한다.

국보인 삼한시대 세형 동검과 동모는 특히 현존하는 한국식 동모 중 가장 큰 규모를 갖추고 있는 귀중한 유물이라는 설명이다. 전시된 국보 가야금관은 현재까지 알려진 가야 금관 중 유일하게 가장 완벽한 형태의 금관이다.

고려시대 은제 아미타여래 삼존 좌상은 이번 전시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소장품으로 특히 놓쳐선 안 될 작품이다. 높이 19.3㎝인 불상과 광배는 섬세함이 놀라워, 작을수록 화려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치게 한다. 미술관 측은 “철불의 철과 대비되는 부드러운 은과 금을 사용해 불교미술에 작용된 야금의 다채로움과 정교함까지 보여주는 수작”이라고 설명했다. 미술관 측은 “그동안 금속을 다루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대장장이, 연금술사, 제련, 금속공예 작가 등 전통과 현대의 분리된 기준으로, 혼용해 써왔다”며 “특히 전통미술의 분야에선 청동기 유물에서부터 오랜 기간 지속된 수많은 금속 미술을 포용하는 용어조차 찾기 힘든 실정이었다”고 설명했다. 고대 청동기, 불교 조각, 금속 공예, 민속 공예 등의 언어로 표현된 미술의 근간에 금속문화가 있다. 전시는 금속문화 내 보편적인 정서를 담은 용어가 ‘야금’이라고 강조하고, 전통과 현대를 관통하면서 소멸하지 않는 혁신의 정신을 보여준다. 12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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