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권력 중독 땐 패배자 될까 두려워해
IMF 이후 위기감, 조바심 더욱 부채질
‘승자 독식’ 규칙 등을 ‘공정’으로 내면화
미래지향적인 이슈 가로막는 양당정치
혁신보다 지지층 향해 안전한 길 선호
국민은 제3정당엔 눈길 안 줘 변화 없어
대선 후보, 남성 겨냥 정책만 우후죽순
여성들에 높은 장벽 또 한번 실감케 해
기득권 도움 없인 청년정치도 쉽지 않아
경제용어인 ‘진입장벽(Entry Barriers)’은 어떤 산업에서 새로운 기업의 진입을 저해하는 경제적·전략적·정서적 요소를 말한다. 한국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러한 진입장벽이 ‘철옹성’화하는 추세다. 기득권은 장벽을 높이기 바쁘고, 비기득권은 장벽을 넘어야 한다는 생각에 압도되고 있다. 사람들은 시스템을 바꾸기보다는 순응하고, 생존게임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골몰하기 시작했다. “장벽 자체를 허물자”는 외침이 희미해진 자리엔 점점 더 굳건해지는 진입장벽 차단 사회가 남았다.
세계일보는 창간 기념으로 정치와 사회, 젠더 등 분야에서 단단히 장벽화한 우리 사회의 실태를 긴급 진단했다. 2022년판 ‘진입장벽 사회’ 인터뷰에 응한 전문가들은 기득권 중심주의가 국가의 혁신과 발전을 가로막는 원흉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편으로는 모두가 기득권 체제를 불신하지만, 다른 모델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시민사회의 한계와 모순을 지적했다.
◆‘뽑을 사람 없다’면서도 그대로인 지지율
한국의 ‘양당정치’는 대표적인 진입장벽이다. 제20대 대통령선거 국면에도 이는 두드러졌다. 어느 때보다 양당 후보에 실망했다는 유권자의 절망감이 강했지만, 양당 후보의 지지율 하락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경향이 뚜렷하다.
정치외교학자인 안병진 경희대 교수(미래문명원)는 “한국 정치를 지배해 온 양당의 적대적 상호의존 체제는 미래지향적 이슈를 봉쇄하고, 긴장감 있는 혁신 자체를 막아왔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이번에도 차별금지법이나 기후위기 등에서 양당의 둔감성이 드러났다”며 “둔감해도, 바뀌지 않아도 얼마든지 집권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상대적으로 이런 의제를 더 언급하긴 하지만 “불편한 진실을 얘기하는 단계로는 굳이 들어가지 않는” 이유다. 대담한 혁신보다는 각자의 지지층에서 ‘마이크로 타겟팅’ 정도에 나서면서 양당 체제의 한계를 또 한 번 드러냈다는 분석이다.
이번 대선에서 거대 양당이 아닌 제3지대 후보 연합을 제안한 ‘대선전환추진위원회’, 여성 유권자 단체 ‘샤우트아웃’ 등에서 활동해 온 김주희(27)씨는 “제3 정당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아직은 부족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양당 선거캠프가 서로 상대가 더 적폐라는 식의 네거티브 전략을 썼고, 국민들이 뽑을 정당이 없다고 하면서도 제3의 선택지는 고려하지 않는” 상황이다. 다당제 등 기득권 양당을 경계하기 위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음에도 유권자나 언론이 이를 잘 상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씨는 “어차피 안 될 사람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표’ 논리가 먹히면서 양당 투표로 귀결하면 국민들이 지는 싸움밖에 남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둘 중 하나는 뽑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양당을 견제할 수단이 없기에 점점 더 선택지의 질이 낮아진다는 의미다.
갈수록 기득권 양당의 스피커만 증폭되는 상황도 우려스럽다. 유튜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는 인기몰이가 되는 양당만 언급되는 추세이며, 언론도 이를 대체로 따라갈 뿐인 양상이라는 지적이다. 김씨는 “양당 적폐 구도를 타파하려면 국민들이 이런 흐름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좀 더 분노하고 뒤집을 수 있어야 한다”며 “좀 더 성숙한 대중의 선택이 필요해 보인다”고 강조했다.
◆사회에 파고든 불안과 조바심
“강자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 기득권을 누리는 이의 성공에 대한 부러움이 섞인 결과 우리는 부당하고 힘센 자를 미워하면서 닮아갑니다.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사회는 더 분열됩니다. 그 결과 경쟁 구도를 만든 강자의 진입장벽은 한층 높아집니다.”
‘대안적 삶’을 주창해 온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글로벌비즈니스대학 융합경영학부)는 저서 ‘강자 동일시’에서 기득권 경쟁사회가 어떻게 모두를 파괴적 악순환에 빠뜨리는지 설파했다. 그에 따르면 돈, 권력, 일에 중독되면 삶이 끝나지 않는 한 스스로 중독을 멈추기 힘들다. 강 전 교수는 “중독을 견인하는 매커니즘은 ‘두려움’”이라며 “가진 것을 상실하거나 패배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끝없이 자신을 파괴하는 결말로 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 사회의 이러한 흐름을 ‘집단적 열등감’으로 분석했다. 강 교수는 “일제강점기 등 역사적으로 강자에 빌붙었던 이들은 계속 잘 풀리고, 저항 정신을 갖고 풀뿌리 관점에서 싸운 이들은 끊임없이 탄압당했다”며 “이를 보면서 강자가 되어야 인정받으며, 더 빨리 더 많이 성취해야 한다는 마인드가 집단적으로 공유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선진국이 되자는 강한 열망,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부든 명예든 권력이든 잡아야 한다는 의식은 그렇게 사회에 파고들었다.
1997년 IMF 외환 위기 이후 전 국민을 강타한 위기감은 조바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사회를 이끌던 주체가 국가에서 자본으로 바뀌었을뿐 기득권 중독 사회의 구조는 유지 및 강화됐다는 평가다. 강 교수는 “요즘은 어린 친구들이 오히려 특권층에 들어가야 한다는 마인드를 부모 세대보다 더 갖고 있기도 하다”며 “우리가 IMF 때 진정으로 성찰했다면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분배와 원천을 생각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결과”라고 꼬집었다.
‘승자 독식’의 규칙, 경쟁하며 치른 희생에 대한 보상심리 등을 ‘공정’이라고 내면화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이러한 틀 자체를 객관적으로 볼 역량이 떨어지게 됐다”고 강 전 교수는 판단했다. 사람과 자연을 훼손하며 만든 성장의 ‘원천’을 살피지 않은 대가는 가혹하다. 그는 “아무리 파이를 키우고, 이를 공정하게 나누더라도 파이를 입에 무는 순간 유리 조각이나 유해물질이 나온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씁쓸하게 반문했다.
◆여성의 기득권 진입 견제 본격화
뿌리 깊은 젠더 권력 역시 진입장벽 사회의 한 축을 차지한다. 여성의 사회 진입 장벽을 뜻하는 ‘유리천장’ 지수에서 우리나라는 9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를 기록 중이다. 여성 국회의원 비율(19%) 역시 5명 가운데 1명도 안 되는 수준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오랫동안 비기득권이던 여성들이 사회 진출을 본격화할 조짐을 보이자 남성 권력의 견제가 시작됐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팬데믹 이후 사회 불안정 요소가 심화하면서 남성의 지위 불안이 가중된 것도 이러한 분위기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여성가족부 폐지, 성범죄 무고죄 처벌 강화, 병사 월급 200만원’ 등이 표심을 자극하는 화두로 떠오르는 것은 이를 잘 드러낸다. 여성의 동등한 사회 진입에 대한 반발이자 ‘페미니즘이 시대 정신으로 자리잡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남성 사회의 결집으로 보는 해석이 나온다.
윤김지영 창원대 교수(철학)는 이런 양상에 대해 “남성들에게 어필하는 전략인 동시에 여성들에게 장벽을 넘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메시지”라며 “대선 후보는 이 사회의 가장 기득권이 될 사람으로,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목소리가 20~30대 남성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윤김 교수는 “2015년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이후 대중화된 페미니즘은 ‘여성도 진입장벽을 얼마든지 넘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공유했지만, 2022년 현재 여전히 여성에게는 사회라는 장벽이 얼마나 높은지 다시 한번 실감하게 만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말 국민의힘 새시대준비위원회에 수석부위원장으로 합류한 신지예 전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가 14일 만에 사퇴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윤김 교수는 “여성 정치인을 핵심 인사나 어젠더로 보지 않고, 가장 먼저 내칠 수 있는 들러리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인식을 보여준 사례”라고 꼬집었다.
성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권 등의 행태는 청년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지 못할뿐더러 구조적 불평등을 은폐한다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윤김 교수는 “고용 불안정, 저출산 등은 복합적인 사회 문제임에도 ‘비혼주의 여성’ 탓으로만 돌림으로써 정치인들은 책임질 필요가 없어진다”며 “페미니즘만 없어지면 다 해결된다는 식의 착시효과를 일으키면서 기득권 카르텔은 균열이 날 필요 없이 손쉽게 독점 자원을 지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위태로운 청년정치의 미래는
사회 곳곳에서 높아지는 진입장벽은 청년 세대의 좌절감도 키웠다. 자산도 기회도 세습화되는 경향에 계층사다리는 붕괴되고, 출발선 격차를 따라잡기 힘들어졌다. 한때 ‘n포 세대’의 무력감을 호소하던 청년들은 위기감이 증폭되자 자기계발 열풍을 주도하고, 코인 투자 같은 ‘고위험 고수익’에 거침없이 뛰어드는 MZ세대가 됐다. 무한 경쟁의 판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생존 전략으로 삼게 된 셈이다.
그러나 물려받는 자원이 없거나 기득권의 도움 없이 청년이 벽을 넘기란 여전히 위태롭다. 정치를 예로 들면 정당 정치에 대한 교육과 경험의 부재는 물론 사회초년생에게 버거운 비용 장벽까지 더해진다. 간호사로 일하며 정치 활동을 겸해 온 20대 청년 김주희씨는 “청년의 정치 참여가 기득권 정당에서 보좌하는 형태 아니면 청년 얘기를 들려주는 식의 수동적인 방식에 그치고 있다”며 “원외 정당에서는 입법이나 정책을 주도적으로 만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안병진 교수도 “윗 세대가 청년들에게 정말 권력을 준다거나 대담한 헤게모니를 쥐어주지는 않고 있다”고 지적하며 “청년 정치인의 리크루팅부터가 기성 정치권 입맛에 맞게만 이루어진다”고 분석했다. 최초의 30대 당대표로 청년정치의 상징이 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최근 내쳐질뻔한 것도 “기득권이 아닌 유권자에 의해 밀어올려졌기에 소위 말하는 보수의 주류에는 아직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다만 청년정치가 소수자를 탄압하거나 성별 갈라치기 형태로 힘을 얻고자 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는 기존 기득권층이 해 오던 약자 배척을 통한 장벽 쌓기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안 교수는 이준석 대표의 반페미니즘 행보에 대해 “여성을 잔인하게 짓밟으면서 자신의 정치 헤게모니를 만들어가는 전형적인 ‘트럼피즘’을 내면화하고 있어 위험하다”며 “이런 방식이 한국에서 얼마나 휘발성 있고 쉬운 길인지 알기 때문에 영악하게 활용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안 교수는 “청년정치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며 “청년이 가진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감수성, 기존 사회에 대한 분노, 뛰어난 능력 등이 대전환기에 합리적 보수·진보의 길로 가느냐 혹은 분노를 악용하는 선동 정치로 가느냐”라고 말했다. 전자의 힘이 센 미국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민주당 하원의원 같은 인물이 밀레니얼의 스타가 된 데 비해 현재 한국은 청년의 좌절감을 ‘을들의 싸움’으로 악용하기 바쁜 후자형에 가깝다는 비관적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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