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 베풀어 공생의 길 찾는게 옳아
사람들은 살기 위해 도시로 온다. 도시는 인간 편의에 최적화된 곳이며, 취업과 문화적 향유의 기회가 더 있다고 여겨지는 까닭이다. 돈과 사람을 빨아들이는 빨판이라는 점에서 도시의 인구 밀집은 당연한 현상이다. 도시에서는 새 이주민과 그들이 가져온 문화가 정주민의 문화와 충돌한다. 나는 어쩌다가 온갖 것이 뒤섞이면서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는 도시에서 살게 된 한 사람이다. 아마도 도시 경관과 문화, 그 이면의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나를 만든 성분의 큰 조각일 것이다.
도시를 공학적 기적이 빚은 산물이라고 한다. 마이크로 인문학자 로먼 마스와 커트 콜스테트에 따르면, 도시는 1%의 보이는 것과 99%의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이뤄진다. 도시는 1%의 보이는 것들, 즉 도로와 보도, 교통 표지판, 자동차, 고층빌딩, 광고판, 쇼핑몰, 시장, 지하철, 배기구, 하수구, 가로수, 주유소, 백화점, 관공서, 금융기관, 공원, 관광객, 노숙인, 비둘기, 길고양이들로 촘촘하게 구성된 시스템이다.
도시에서는 새것과 옛것이 섞이고 출렁이며, 날마다 숱한 사고와 사건들로 새로운 드라마가 엮인다. 랜드마크는 도시 경관학의 거점이면서 도시 드라마가 일어나는 주요 장소다. 뉴욕의 타임스스퀘어, 로마의 트레비분수,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파리의 에펠탑, 암스테르담의 운하, 베이징의 톈안먼 등은 저마다 특이점을 갖춘 경관을 자랑한다. 도시 경관은 도시 행정가와 시민의 심미적 이성과 취향, 물질의 풍요를 동시에 드러낸다. 아울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진 도시의 네트워크 인프라는 치차처럼 맞물려 움직인다.
서울올림픽 개막식 때였나, 폐막식 때였나? 푸른 하늘로 일제히 비상하는 비둘기 떼는 볼거리였다. 본디 비둘기는 유럽 왕실에서 길렀고, 귀족 사이에 선물로 주고받던 새였다. 16세기에 유럽에서 캐나다로 건너온 뒤 미국 전역으로 퍼지며 개체 수가 늘었다. 비둘기는 흔해지면서 인간의 관심과 사랑 밖으로 밀려났다. 한때 서울의 서쪽 양화대교 부근으로 자주 산책을 나갔다. 한강공원엔 늘 낚시꾼과 비둘기들이 북적거렸는데,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다가 한 낚시꾼에게 지청구를 들었다.
많은 사람이 비둘기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골칫덩이라고 생각한다. 평화의 상징으로 사랑받던 비둘기는 어쩌다가 천덕꾸러기가 되었나? 음식 찌꺼기나 토사물을 먹어 치우는 도시의 청소부,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자 “하늘을 나는 쥐”라는 불명예도 비둘기의 몫이다. 비둘기가 유해조수로 낙인찍히면서 여러 퇴치기술이 개발되기도 했지만 비둘기가 도시에서 둥지를 틀고 살게 된 것은 그들의 뜻이 아니다. 비둘기를 불러들인 건 사람들이 아닌가?
도시에서는 덜 중요한 것은 불도저로 밀어내거나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없애 버린다. 그런 방식으로 도시는 수용과 배제의 드라마를 엮는다. 수용과 배제의 기준은 인간 중심의 효용가치다. 도시의 매끄러운 경관 이면에는 존재하지만 인지되지 않는 것들, 음지 쪽에 머물러 안 보이는 더 다양한 존재들이 우리와 함께 산다. 이를테면 서울 도심 한가운데를 차지한 종묘에는 야생 너구리 가족이 터를 잡고 길고양이와 공생하는 게 밝혀지며 놀라게 한 바 있다.
비둘기와 길고양이를 도시 환경의 잉여로 낙인찍고 배제하는 게 옳을까? 분명한 것은 길고양이나 비둘기도 도시 환경의 엄연한 일부라는 점이다. 이들을 유동인구와 지역개발로 건축학적 경관과 조경이 수시로 바뀌는 도시로 불러들인 것은 우리다. 이들을 천대하고 적대하는 건 옳지 않다. 도시의 골칫덩이가 된 게 이들의 잘못만이 아니라면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공생하는 길을 찾는 게 옳다. 이들이 사람과 한데 어울리며 역동할 때 도시는 더 활기 찬 생태계의 본모습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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