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정인아…정말 미안하고 사랑한다. 하늘에서는 꼭 행복하기를 바랄게.”
지난 28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동문 앞에는 2년여 전 세상을 떠난 한 여자아이의 추모식이 열렸다. 이날은 생후 16개월 된 입양아 ‘정인이’를 학대로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양모와 이를 방조한 양부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온 날이다.
1심부터 2심, 대법원까지 2년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재판이 이어졌는데, 양부모에 대한 마지막 판결이 나오는 날 정인양을 위한 추모의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이곳에는 정인양의 모습이 담긴 액자, 국화꽃, 추모 메시지, 그리고 파란색 바람개비가 놓였다. 파란색 바람개비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30여명의 ‘엄마’들이 정인양이 하늘에서 맘껏 뛰어다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준비한 것이다.
서울 동작구에서 온 오모(40)씨는 국화꽃을 헌화하며 사진 속 정인양의 얼굴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정인양과 비슷한 나이의 딸이 있다는 오씨는 “이런 자리는 마지막일 것 같아서 나왔다. 가해자들에 대한 최종 판결이 나오는 날 함께하고 싶었다”며 “정인이가 묻힌 경기 양평의 한 공원묘원에도 여러 번 찾았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먼 곳에서부터 정인양을 추모하기 위해 온 이들도 있었다. 대전에서 기차를 타고 온 양모(49)씨는 ‘사랑하는 정인아 보고 싶다. 정인아 미안하다’라는 내용의 메모를 남기며 추모했다. 그는 “뉴스를 보면서 욕이 멈추지 않아 정인이 사건 재판이 열릴 때마다 법원을 찾았다”며 “이렇게 2년 넘게 재판이 이어져 정인이가 편하게 눈도 감을 수 없는 사건인지 의아하다. 불쌍해서 눈물만 나온다”고 토로했다.
김모(43)씨는 정인양을 위한 ‘밥상’을 차리기 위해 강원 정선에서 전날 서울로 왔다. 그는 쌀밥과 보리굴비, 갈비찜, 나물을 유모차 위에 차렸다. 정인양의 양모는 정인양이 음식을 잘 먹지 못할 때면 팔을 마구잡이로 흔들었고, 그런 양모에게 양부는 ‘온종일 굶겨보라’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씨는 “정인양이 평소에 음식도 제대로 못 먹었을 것”이라며 이런 자리가 있을 때마다 음식을 준비했다. 그는 “‘자기 새끼가 먹는 것만 봐도 부모는 배부르다’라는 말이 있는데 정인이의 양부모는 자기들의 배만 불렸다”며 “정인이가 지금이라도 잘 먹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했다. 너무 슬퍼하지 말고 하늘에서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전했다.
이들이 양부모의 엄벌을 촉구하기 위해 법원에 제출한 진정서만 해도 셀 수 없이 많다.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대아협)에 따르면 전날까지 대법원에 제출된 진정서만 2만8557통이다. 하지만 1심에서 양모에 대해 무기징역을 내린 것과 달리 2심에서 징역 35년으로 감형하면서 분노가 쏟아졌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사전에 범행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살인을 준비했다고 볼 만한 사정은 없다”며 징역 35년으로 감형했다. 재판부는 병원으로 이동하며 정인양에게 CPR(심폐소생술)를 한 점, 분노와 스트레스 등을 제대로 통제·조절하지 못하는 심리적 특성이 있던 점 등도 감형 이유로 들었다. 이 같은 양형 사유에 대아협 회원들은 “감형 사유가 납득이 안 된다”, “합당한 처벌이 아니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날도 2심 판결을 유지하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회원들은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소식을 듣고 눈물을 터뜨리는 이들도 많았다. 이날 자리에 나온 한 어머니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정인이를 위해 양부모에게 엄벌을 내려 달라는 진정서를 수백통 접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혜정 대아협 대표는 판결 이후 기자들 앞에 서서 “1심에서 (장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을 때 재판부가 아동학대 가해자들에게 엄벌을 내린다는 희망을 가졌지만, 2심에서 형량을 깎고 대법원에서 이를 확정해 절망스럽다”며 “법이 아동학대 문제에 대한 경종을 울리리라 기대했는데 많이 아쉽다”고 밝혔다. 또 “정인이뿐 아니라 모든 피해 아동을 위해 재판부가 엄벌을 내려 인식 전환을 위한 노력에 나서야 한다”며 “정부는 아동학대 예방을 위한 예산을 확충하고 피해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지원에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전문가들은 ‘정인이 사건’ 이후 아동학대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가 높아지고 여러 제도가 변화했다고 평가하면서도 더 세밀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 정인이 사건 이후 ‘정인이 방지법’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법안이 쏟아졌고,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 3월 정인이 사건으로 신설된 아동학대살해죄의 양형기준을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제도적으로 미흡한 점이 많다는 것이 전문가들과 단체 측의 의견이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사건이 공론화돼 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아이들을 학대로부터 분리하고 학대한 부모 등을 엄벌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며 “그 이후의 생활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회복할 수 없는 관계라면 친권을 박탈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좋은 부모가 될 수 있게 교육, 훈련,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이가 학대를 당해 분리가 이뤄진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 원가정 혹은 그 가정과 유사한 환경에서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제도와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학대를 당한 아이는 후유증이 심하기 때문에 이를 치료할 수 있는 사후 조치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영미 변호사(전 법무부 아동인권보호 전문위원)는 학대를 당하는 아이를 조기에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어린 아이일수록 의사 표현을 하기 어렵다”며 “이런 경우 학대를 어떻게 발견할 것인지에 대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어린이집, 학교 등에서 가정에서 일어난 아동학대에 대한 의심스러운 정황을 발견하더라도 무작정 개입하기도 어려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홍창표 대아협 사무국장은 “다음 정권에서는 아동학대 등 아동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면서 “아이들은 국가의 초석 아닌가. 정인이 같은 아이들이 매년 3∼40명씩 생기고 있다. 전체적인 구조를 모니터링하고 개선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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