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 상징서 주체적 여성 탈바꿈
애절함과 신명나는 소리 자유자재
국악기와 기타·드럼 등 연주 조화
국립무용단 춤사위 등 볼거리 다양

“양반이 부르면 무조건 가야 하니? 못 가! 사또 자제면 자제지 초면에 아무나 오라 가라 염치없이 들이대도 된단 말이냐?”(춘향이 방자에게)
“난 이 혼인증서 믿지 않아요. 우리 어머니(월매)도 아버지(성참판 영감)가 써주신 혼인증서에 평생 목을 매고 사시다가 결국 버림받았지요.”(춘향이 몽룡에게)
지난 4∼8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올려진 국립창극단의 창극 ‘춘향’은 우리가 알고 있던 판소리 ‘춘향가’ 속 춘향이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순종적이고 정절의 상징이던 춘향이가 창극 ‘춘향’에서는 주체적이고 당돌한 여성으로 확 바뀌었다. 마치 ‘우리 춘향이가 달라졌어요’ 같다. 단옷날 남원 광한루로 나들이 갔다가 그네 타는 춘향이를 보고 반한 몽룡이 방자에게 춘향을 데리러 오라고 하자 단번에 거절하는 장면이 그렇다. 이어 애가 탄 몽룡이 한밤중 집에 찾아와 사랑을 간청한 뒤 월매 요구에 따라 써준 혼인서약 증서를 춘향이 바로 찢어버리며 몽룡의 진심을 확인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2년 전 초연에 이어 다시 극본·연출을 맡은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창극 ‘춘향’을 통해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춘향의 모습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현대적이고 새롭게 변신한 춘향을 만들어보고 싶었다”며 “사랑의 열정과 이별의 격렬한 슬픔, 신분적 억압에 대한 분노를 마음껏 펼치도록 춘향 캐릭터를 바꿨다”고 말했다. 판소리 영화 ‘서편제’(1993)로 널리 알려진 김 연출가는 임권택 감독 영화 ‘춘향뎐’(2000) 각본과 국립창극단 최초 완판장막창극 ‘춘향전’(1998) 대본을 직접 쓸 만큼 판소리에 조예가 깊다. 그는 “수백명 명창이 오랫동안 갈고닦아 온 판소리 ‘춘향가’의 뛰어난 선율을 살리는 데 최대한 공을 들였다”며 “‘사랑가’ ‘이별가’ ‘옥중가’ ‘어사출도’ 등 눈대목(판소리에서 음악적·예술적 짜임새가 뛰어나 인기가 많고 널리 알려져 명창들이 자주 부르는 노래)들은 푸치니나 베르디가 작곡한 오페라의 어느 아리아보다 더 감동적인 명곡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공연을 보면 괜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초연 때와 비교해 공연장 규모(달오름 512석→해오름 1221석)가 중극장에서 대극장으로 커지고, 공연시간(120분→140분)도 늘어났지만 배우들의 시원하면서도 구성진 소리와 발림(극적 내용에 맞춰 표현하는 몸짓)을 넘어서는 무용에 캐릭터별로 안성맞춤인 연기가 무대를 꽉 채운다. 극도 속도감·박진감 있게 진행돼 지루할 틈이 없다. 전통 국악기에 신시사이저·기타·드럼 등이 어우러진 음악은 신명나고, 국립무용단 무용수들이 펼치는 춤사위와 여러 폭의 수묵담채화를 보는 듯한 무대, 한복의 멋스러움이 비치는 의상, 영상도 풍성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특히 창극인 만큼 쟁쟁한 실력을 갖춘 소리꾼 배우들의 노래(창)는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춘향(이소연·김우정)과 몽룡(김준수·김수인)을 비롯해 월매(김차경·김금미), 변학도(최호성), 향단(조유아), 방자(유태평양) 등 주요 배역뿐 아니라 국립창극단 중견·젊은 배우들의 노래는 고저장단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애절하면 애절한 대로 신나면 신나는 대로 관객들 감정을 주무른다. 무대 양쪽 대형 모니터를 통해 한글과 영어 자막이 떠 관람하는 데 큰 불편을 못 느낀 외국인 관객들이 ‘춘향’의 작품성과 완성도에 감탄하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한다.
‘순수한 사랑의 힘이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하고자 한 이 작품의 메시지는 공연 마지막, 춘향과 몽룡이 환한 얼굴로 15m 길이 대형 그네를 타고 땅을 박차 오르는 장면에 오롯이 담긴다. 남녀노소·국적 불문하고 관객 모두 함께 나는 것처럼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창극 ‘춘향’은 외국 유명 오페라나 뮤지컬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국립극장은 공연 실황 영상을 올 하반기에 공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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